아버지 생각을 하면 난 늘 섭섭했던 것들만 뾰족이 올라오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일마다 여자가 이러면 안 된다며 반대부터 하셨고,
난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나를 묶어 두지 말라고 대들기 일쑤였다.
또 몸이 약한 당신 때문에 그 많은 농사일을 도맡아 하느라 지쳐 있는 엄마에게
늘 잔소리만 하시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슬픔보다 나 하나 덜렁 출가시키고
남은 동생들과 뒷일을 꾸려 갈 엄마에 대한 염려가 앞섰다.
시간이 흘러 난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이 교실청소를 돕기 위해 이따금 학교에 갔다.
어느 날 교실청소를 마치고 엄마들과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봄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텅 빈 교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운동장을 가로질러
내 쪽으로 아버지가 걸어오는 환영을 보았다.
늦게 결혼해 첫딸을 얻은 아버지는 나를 일곱 살에 입학시켰고,
마음이 안 놓이셨는지 육성회 일을 자처하셨다.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는 날이면 내 고무줄을 자르며 짓궂게 굴던 남자아이도
아버지에게 이른다는 내 말에 한풀 꺾이곤 했다.
그렇게 학교에 들어서시던 아버지.
큰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어느 해 봄, 아버지는 논 가득 봄배추를 심으셨다.
배추를 뽑아 단으로 묶어 트럭 높이 싣고 팔러 가셨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는
배추색깔의 돈이 아니라 내게 주실 전자올겐이 들려 있었다.
시범으로 <고향의 봄>을 한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치시던 아버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산 피아노가 배달되어 오던 날,
아버지 당신이 그 까만 전자올겐을 들고 웃고 계셨습니다.
살아갈수록 느낍니다.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