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주
햇볕과 바람과 비와 인간 속에서 저절로 익은 포도주
나를 마셔라
부드럽고 달콤새콤한 맛은 모두
고뇌의 흔적이 낳은 은총
눈물에든 웃음에든 맘껏 섞어 마셔라
태풍과 폭우와 욕망과 배덕의 식은 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익은 포도주
와서 나를 마셔라
돼지에게는 돼지의 맛
소에게는 소의 맛
나귀에게는 나귀의 맛
개에게는 개의 맛
인간에게는 인간의 맛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맛과도 교제한다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理想에 겁먹고 性에 굶주리고 향수에 시달린 이들이여,
서슴없이 와서 나를 맛보라
자연과 인간의 눈물이 죽도록 사랑해서 만들어놓은
十惡十善의 맛이 골고루 응축되어 있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는 포도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커다란 축복
언제나 나는 그대들 속에
숙명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김상미
Tag :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