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언어들을 위한 연가 *
안재동
시월 어느 쌀쌀한 새벽
물 마른 버드나무 잎새 언저리
색채 없는 수채화처럼
여름 언어들이 창백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있다
온 밤 길을 밝게 비춘
가로등 불빛을
계엄군인양 거만하게 출현한
일광이 소리 없이 거두어가고
머지않아 비바람이 몰려와
버드나무 잎새를 떨쳐내리라
여름 언어들은 이제
땅 속 어딘가 차디차게 묻혀
기억의 한 귀퉁이에
주검처럼 포개질 것이다
용암처럼
뜨거운 축제와 벅찬 감동으로
충만했던 여름 언어들
시간의 그물에 포획되어
썰물처럼 빠져나갈 자리
잔이 비면 누군가 또 잔을 채우듯
다른 언어들이 빈 공간에 짐을 풀고
노래는 계속되겠지
여름 언어들은 떠나도
햇빛은 곡식을 영글게 하고
좋은 만남이 사랑을 잉태하듯
남겨질 잔영들
때로는 그리움으로 기억의 한켠에서
마른 장작 타듯 언제나
활활 지펴져 가슴 저리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