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솔밭에서 * / 안재동
오랫동안 기다렸지요. 참 그리웠습니다. 마침내,
가을 솔숲 사이로 모습을 나타내는 당신.
내 강렬한 눈빛과 홍조 짙은 얼굴,
솔숲을 진동시킬 것 같은 심장소리에 경계라도 하듯
저만치서 그만 엉거주춤 서네요.
난 열렬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담담하지요.
고요한 솔숲 사이로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 든
세찬 바람 한 줄기, 밉살스런 몸짓으로
소나무 가지를 마구 흔듭니다.
안절부절 못하는 소나무들, 저 바람을 어쩔까요.
당신은 차라리 날 밀치거나 스치기라도 하는,
그도 아니면 잠시 바라봐 주기라도 하면 좋을
그런 바람일 수도 있는데요.
솔밭에 선, 가을의 저 소나무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면 정녕 무엇일까요.
여름 내내 수채화의 객체간 경계처럼 불분명하던
하늘 맞닿은 솔숲의 스카이라인이 아주 선명하네요.
돌아보니 당신은 벌써 사라지고
오래전 잃었던 기억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빨간 고추잠자리 몇 마리, 허공을 뱅뱅돌면서
푸른 하늘에 동그란 창窓을 만드네요.
그 창 속에서 어렴풋이
흑백사진 같이 빛 바랜 일기와 편지들이 보이고
어딘가에서 세레나데풍의 소리가 나직이 들려옵니다.
어느 연인이 외로이 부르는 사랑노래일까요,
짝 잃은 풀벌레의 슬픈 울음일까요 ,
내 안에 우는 그리움의 바람일까요,
가을비처럼 온 솔밭을 소슬하게 적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