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저녁에, 순미가 심부름 가느라고 놀이터를 지나갔거든요.
'그네 한 번 타고 갈까?'
'아냐, 아냐. 엄마 심부름 가는 거잖아.'
'미끄럼틀 딱 한번만 타고 갈까?'
'안 되지, 안 돼!' 난 두부 하러 가는 걸.'
순미는 놀이터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갔지요.
그러다가, 아까시나무를 지나가는데
"엄마야! 벌레!"
순미는 깜짝 놀랐어요.
쭉 뻥은 아까시나무 기둥을 타고 애벌레 한 마리가 꾸물텅꾸물텅 내려 오고 있는 거예요. 엄마 손가락만큼 굵고 큰 애벌레더라구요. 초록색 애벌레 말예요.
순미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건 비밀인데, 순미는 벌레란 벌레는 다 무서워한대요.
순미가 소리를 꽥 질렀더니 가까이 있던 아이들 너댓이 모여들었어요.
"야, 진짜다. 애벌레 되게 크다."
아이들은 빙 둘러서서 애벌레를 구경했어요.
한 사내 아이는 어디서 나뭇가지를 주워 왔는지, 그걸로 애벌레를 톡톡 건드리는 거예요. 애벌레도 놀랐는지 그만 몸을 잔뜩 움츠렸죠.
"어, 가만히 있네. 가 봐. 가 봐."
사내 아이는 나뭇가지로 애벌레 몸을 슬쩍슬쩍 밀어냈어요. 하지만 애벌레는 꼼짝도 안 했지요.
"아유, 징그러!"
한 아이가 몸서리를 쳤어요.
우쭐해진 사내 아이가 이번에는 나뭇가지로 애벌레를 들어올렸어요. 애벌레는 균형을 잃고, 기우뚱, 잔디밭으로 곤두박질쳤어요.
"아이, 끔찍해!"
순미는 얼른 아까시나무를 뛰어 지나갔어요. 하지만 등뒤로 아이들 목소리가 자꾸 들려왔어요.
"죽었나 보다!"
"에이, 재미없어."
두부를 사 들고 달랑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순미가 아까시나무를 바라봤어요.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나 봐요. 사내 아이 혼자 있어요.
순미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 아이 하는 짓을 바라봤어요.
"어, 아직까지 저러구 있네."
순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어요. 조금 용기가 나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아까시나무 밑으로 다가갔어요.
사내 아이는 순미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나뭇가지로 애벌레를 지그시 누르잖아요. 그러니까 글쎄, 애벌레 몸에서 물 같은 것이 지익 흘러나왔어요.
순미 얼굴이 그만 일그러졌어요.
"그만 해. 애벌레라구 괴롭히면 안 되는 거야."
"니가 뭔데 참견이야?"
"불쌍하잖아."
"벌렌데 뭐가 불쌍해?"
"죽으면 어떻게 해. 그만 해"
순미는 저도 모르게 사내 아이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나꿔 챘어요.
"에이 씨. 이게 진짜……."
사내 아이는 순미 가슴을 세차게 떠밀었어요. 순미는 힘없이 나둥그라졌지요. 순미는 그만 울먹울먹, 눈가엔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 고였어요.
"에이, 씨."
사내 아이는 화가 나서 놀이터로 씽하니 달려가 버렸어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순미는 애벌레를 가만히 들여다 봤어요. 초록 애벌레가 움직이지 않아요.
"놀랬나 봐. 꼼짝도 안 하네."
애벌레를 놔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요. 애벌레 몸에서 흘러나오던 진물이 말예요.
"엄마, 두부 사 왔어요." 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도 자꾸만 애벌레 모습이 떠올랐어요.
'애벌레는 어떻게 됐을까? 그 애가 또 와서 애벌레를 괴롭히면 어떻게 하지?'
순미는 땀을 뽀질뽀질 흘리며 그림을 그렸어요. 삐뚤삐뚤 글씨도 썼어요.
"다 했다!"
어질러 놓은 크레파스랑 종이들은 치우지도 않고 순미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열심히 그린 그림을 들고 말예요. 저녁밥 짓던 엄마가 물었어요.
"어디 가니?"
"조오기."
"그건 뭐야?"
"그림 종이."
"뭐하게?"
"몰라도 돼요.!"
순미는 숨을 할딱거리며 아까시나무까지 뛰어갔어요.
"어디지? 어디였더라."
순미는 허리 굽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어요.
"아, 여깃다! 어? 어……"
애벌레를 찾았어요.
하지만 애써 찾은 애벌레가, 글쎄 그 애벌레가 짧은 다리들을 다 내보이며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거예요.
'죽었나 봐. 참말로 죽었나 봐. 이거 붙여 줄려고 그랬는데……."
순미 어깨가 축 늘어졌어요.
금세 순미 눈에 눈물이,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 그리고 뚜욱 떨어졌어요.
하지만 순미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어요.
'여기 애벌래 잇어요. 개로 피지 마라요.'
여름날 저녁바람이 부네요. 그림 종이만이 순미 손에서 팔랑팔랑 흔들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