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슬이의 하루
김 옥 곤 ==>홈페이지 아이콘을 클릭하면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서기 2054년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다슬이는 눈을 뜨자 마자 손목에 차고 있는 컴퓨터의 키를 눌러 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손목시계처럼 작은 컴퓨터의 액정화면에, [예정대로. 서울역 08:30. ㅎ&ㅂ.]이 나타났습니다.
' ㅎ&ㅂ' 는 할아버지의 통신암호입니다.
다슬이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아빠를 불렀습니다.아빠는 알겠다는 듯 침대 머리맡의 자가용
제어기 단추를 몇번 눌렀습니다. 다슬이가 현관문을 열고 후다닥 뛰어나갈 때, 엄마와 다슴이
누나가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돔형의 105층 아파트에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슬이가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전자동 태양에너지 자동차가 문을 열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슬이가 차를 타고
"서울역! "이라고 말하자, 자동차는 알겠다는 듯 금방 문을 닫고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울산행 자기부상 열차를 타고 나자, 다슬이는 그제사 할아버지가 왜 울산에 내려가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창 밖으로는 주인을 태워다준 빈 차들이 줄지어 돌아가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전자책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는 다슬이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이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 다슬아, 궁금했지. 울산은 아마 처음일테지. 그곳에 이 할애비의 제자가 한 사람있는데, 말야.
그사람이 이번에 식물이 느끼는 감정을 사람의 말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게야.
근데 먼저 나한테 보여주고 난 다음 학회에 보고하겠다지 뭐냐. 그리고 이번 기회에 울산에 가면
너한테 꼭 보여줄 것도 있고 해서 말야. 참, 다솜인 엄마 아빠랑 금강산의 어린이 대공원엘
간다고 하던데, 넌 어때? 그곳이 더 가고 싶지 않던? "
" 아녜요, 할아버지. "
그건 정말 그렇습니다. 다슬이는 언제나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식물공학
박사인 할아버지는 이미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바이오테크놀로지 수법으로 푸른 장미를
꽃피우게 하신 분입니다. 할아버지를 만나 얘기를 나누면, 평소 다슬이가 궁금했던 것들이 술술
아주 쉽게 풀리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울산에 가서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 무엇일까? 말하는 식물? 그것 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대체 뭘까? )
다슬이는 이렇게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울산행
자기부상 열차는 소리도 없이, 그러나 총알처럼 빠르게 벌판을 가르고 달렸습니다.
울산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지 꼭 한시간 반만인 오전 10시 정각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대학 제자라는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높은 돗수의 안경을 낀, 얼굴엔
온통 시커먼 털로 뒤덮인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풍겼습니다.
과학도시 울산은 털보 아저씨의 첫인상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곳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온통 푸른 숲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공장과 연구소들이 모두 숲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물론 주택가와 고층 빌딩, 아파트 단지들도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다리를 지날 때 강물이 햇살에 부서져 은빛으로 출렁거렸습니다.
털보 아저씨가 근무하는 연구소에 도착했습니다.그것에서 다슬이는 식물들이 말을 하는 걸
들을 수 있었습니다.온갖 복잡한 기기들을 연결해서 식물이 느끼는 감정을 전파로 바꿔서 그걸
사람의 음성으로 합성해 내는데,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습니다.
"- 어린 사람-만나서 반가와요-우릴 사랑해 주셔요-우리도 당신들을-사랑한답니다-"
연분홍 철쭉꽃 한송이가 이렇게 다슬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다슬이도 그들을 모두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할아버지는 훌륭한 연구라고 털보 아저씨를 칭찬했습니다.
털보 아저씨가 손수 차려준 식사를 하고 난 뒤 할아버지는 다슬이를 데리고 그 도시의
시뮬레이션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보여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다슬이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린이날이라 그런지 박물관 안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말하는 로봇이 안내를 맡고 있었고, 전시실마다 예쁜 홀로그램 아가씨들이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슬이가 유물관과 자료관을 거쳐 공해관이란 데를 왔을 때였습니다.
" 내가 오늘 보여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곳이란다. 비록 가상현실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건
실제 있었던 일이란다. 자, 안경을 쓰거라."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다슬이는 특수안경을 쓰고 시뮬레이션 의자에 앉았습니다. 스크린에는
곧 입체 영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과학도시 울산의 전경입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면서 시간이 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화면에 연도 표시가 휘리릭 지나 가면서
2004년에 딱 멈춰 섰습니다.
50년 전, 울산의 모습은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하늘은
광화학스모그로 회색빛이었고 강물은 검정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금방 쓰러질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쓰러지는 재난이 닥쳤습니다. 거리 여기 저기에는
도시를 탈출하기 위한 자동차들로 길이 메워져 있고,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대낮인데도
하늘에는 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 근교의 야산에서는 짐승들이 슬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산과 들의 풀과 나무들은 꺼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숨쉴 공기도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생명이 살 수없는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다슬이는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아 더 이상 그 끔찍한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특수안경을
벗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시뮬레이션 의자에서 내려섰습니다. 그런 다슬이를 보고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다슬아. 자연의 소중함을 알았겠지. 식물들도 감정이 있고, 말을 다 하지않던가 말이다. 이곳
울산이 오늘의 모습을 다시 찾는덴 무려 50년의 세월이 걸렸단다. 너희들은 앞으로 절대로
앞서간 선조들 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해선 안되겠지. "
다슬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아버지와 다슬이가 막 시뮬레이션 박물관 밖으로 나왔을 때였습니다. 다슬이의 손목에 차고
있는 컴퓨터에서 신호음이 울렸습니다.금강산에서 다슴이 누나가 보낸 신호였습니다.
[ 아, 멋져. 다슬아, 용용. ㄷ&ㅁ. ]
다슬이는 씩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소형 컴퓨터의 키보드를 꾹꾹 눌렀습니다.
[ 난 더 멋진 하루. 금강산에 휴지 한장, 나뭇가지 하나 버리거나 꺾지 말 것. ㄷ&ㄹ.]
손목시계처럼 작은 화면에 이런 글자와 기호가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보시고 큰소리로 웃으셨습니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