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새
김 옥 곤[김 옥 곤 홈페이지: http://myhome.netsgo.com/kyungon
1.철새입니까, 텃새입니까?
교실 문을 열고 나와서도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서 있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벌써 운동장에 나와 왁자지껄 떠들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 저 아이들과 현안 대체 무엇이 다르담. 어쩜 애가 그렇게 엉뚱할까.)
나는 현아의 그 고집스런 뾰로통한 입술을 떠올리고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 아니, 유 선생님. 뭘 그리 혼자 싱글벙글 이십니까? "
맞은 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박 선생님이 둥그렇게 눈을 치떴습니다. 나는 그러는 박 선생님을 놀려주고 싶어졌습니다.
" 선생님! 봉황새는 철새입니까, 텃새입니까? "
" 네? "
이제 정말 두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 박 선생님을 복도에 남겨두고, 나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어 웃음을 참으며 교무실 쪽으로 바삐 걸어가 버렸습니다.
곧 뒤따라 교무실에 들어온 박 선생님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어 왔지만, 나는 그냥 그래 본 거라고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그래도 박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 봉황새는 상상의 새 아닙니까? "
하고는 창가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 귓전을 메아리처럼 또랑또랑 울려 퍼지는 현아의 목소리에 휩싸여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 선생님! 봉황새는 철새입니까, 텃새입니까? "
느닷없이 현아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잠시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 애의 얼굴만 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교실은 고요해졌습니다. "철새와 텃새"에 관해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몇몇 아이들의 질문을 받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멀뚱해진 내 모양이 이상스러웠는지 현아의 질문이 별난 것이었는지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나는 곧 현아를 보고,
" 뭐라고 그랬어요, 현아? "
해 놓고는 , 이 애가 왜 또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할까.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 키는 5∼6척. 오색의
날개 무늬에 오음의 소리를 낸다고 함. 봉은 수컷, 황은 암컷.
나는, 옳지 그럼 이 ⑴의 봉황을 현아가 말한 거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 그럼, 이 베트남의 봉황은 텃새인 셈이군요? "
" 그렇지요. 여기 적혀 있는 걸로 봐선 틀림없지요. 내가 뭐 조류학자도 아니고...... ."
박 선생님은 멋적게 웃었습니다.
나는 박 선생님이 말할 수 없이 고마왔습니다. 다음 시간이 산수시간이었지만 현아에게 봉황새에 대한 의문을 깨끗이 풀어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칠판에 동남아시아의 지도를 그리고 베트남을 가리키면서 자세히 설명했지만 현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무룩한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몇번이나 알아듣기 쉽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녀석은 끝내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제물에 김이 빠져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교실을 빠져 나가버렸습니다.
( 그럼 현아가 말한 봉황새가 정말 상상의 새란 말인가? )
이런 생각에 잠겨 나는 한손으로 블라우스 앞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기만 했습니다. 나는 현아가 그린 봉황새 그림을 보고 나자, 어쩌면 그애가 봉황새를 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새는 베트남의 봉황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줄곧 내 생각과 경험 안으로만 그애를 끌어들이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는 내일 오후 현아의 집을 방문해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현아의 부모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입니다.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기도 하고, 현아의 집은 일학기 때 가정방문을 가 보아서 알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 봉황새의 정체를 꼭 밝혀봐야지. )
마치 나는 셔올록 호옴즈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들떠서 쥐고 있던 색연필에 불끈 힘을 주었습니다.
3.일요일 아침
앞집의 기와지붕 위로 아침햇살이 금싸라기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잠옷차림으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습니다. 아침공기가 맑고 상쾌합니다. 이층의 베란다 창을 열고는 졸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고분인 "봉황대"가 여느 때처럼 성큼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졸음이 확 달아나버렸습니다. 봉황대 꼭대기에 작은 아이 하나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데 뒷모습이 현아하고 너무나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눈여겨 그 아이를 보면 볼수록 현아가 틀림없습니다. 나는 연립 주택의 층계를 뛰어내려갔습니다. 숨돌릴 틈없이 봉황대쪽으로 달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봉황대"를 한바퀴 빙 둘러봤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의 일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현아의 집을 찾아 간 것은 오후 3시가 훨씬 지나서였습니다. 마침 시내 국민학교 여선생님들의 모임이 있어 점심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다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 가 버린 것입니다.
미리 전화를 드리긴 했지만 현아의 어머니는 기다리고 계시다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여고생인 현아의 누나도 집에 있었습니다. 시청 공무원인 현아의 아버지도 집에 계셨는데 정작 현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현아를 찾는 눈치를 알아채고 현아 아버지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 허, 참. 요즘 그 녀석은 제 외가집에서 아주 살다시피 합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고 어제 저녁에 그리로 갔지요. 근데 현아가 왜 무슨 말썽이라도 부렸나요? 선생님. "
" 아, 아니에요. 말썽을 일으킬 애가 아니죠, 현안. 그런 게 아니라…… ."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죽 늘어 놓았습니다.
현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뚱거렸습니다.
현아의 아버지가 어이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 허, 고녀석 참. 봉황새라니… . 하긴 저희 외할아버지가 새집을 하고 계시긴 한데… . 아마 거기에도 봉황새는 없지, 여보? "
너털웃음을 치시는 현아 아버지를 따라 현아 어머니와 나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때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들고 들어오던 현아 누나가 얘기를 거들었습니다.
" 참, 그러고 보니 지난 달에 백문조가 죽고 부터 얘가 좀 이상해지긴 했어요.며칠동안 퉁퉁 눈이 부어 울었거든요. 곧 괜찮아지긴 했지만 밤에 잠들 때 곧잘 봉황새, 봉황새 하고 헛소릴 쳤어요. 그리고 뭐 봉덕이라든가......? 잠꼬대 하는 걸 잠결에 들은 것 같아요. "
나는 얼른 짚히는 데가 있어 현아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 그래요? 근데 현아 어머니, 그 새집이 혹시 봉황대 곁의 예쁜 새집이 아닌가요? "
" 네, 아버님 어머님 두 분께서 새를 무척 좋아하셔서요. 선생님도 오고 가시며 가게를 보셨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그 애가 왜 그런 생각을......? "
현아의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리십니다. 그러고 보니 새집의 할머니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그분들이 현아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시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나 이제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 현안 조금도 걱정하지 마셔요. 좀 엉뚱하긴 하지만 현안 똑똑하고 무엇보다 성격이 활달하니까 염려없어요. 제가 가는 길에 할아버지 댁을 들러보겠어요. 그럼...... ."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니까,
" 선생님. 정말 봉황새가 있으면 현아한테 꼭 잡아오라고 그러십쇼! "
하며 현아 아버지가 껄껄 웃으십니다. 우리도 소리를 높여 웃었습니다.
4. 예쁜 새집에서
" 예쁜 새집"은 밖에서 볼 때보다 안이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치 내가 숲속의 요정이라도 된 듯이 황홀했습니다.
" 삐 삐룽 삐룽! 삐루, 삐, 삐, 재지지 재재 뽀, 뽀롱! 뽀로롱 꾸릉, 꾸르르릉 지지재재 삐! 삐루......릉, 삐룽...... ."
온갖 새소리와 새들이 포롱 포롱 날개짓치는 소리가 어울어져 싱그럽게 피어 있는 국화랑 소나무 분재가 여기 저기 숨어 있는 실내는, 어느 숲속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습니다.
마침 할아버지 혼자서 새장마다 노란 좁쌀 모이를 주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 내가 새를 사러온 손님인 줄 알았습니다.내가 현아의 담임선생이라고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는 돗수 높은 안경을 치켜 올리시고는 눈가에 가득 주름을 잡으며 반겨주셨습니다.당장 현아를 불러오겠다며 뒷문으로 나가시려는 걸 나는 말렸습니다.
" 아니예요, 할아버지. 현안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할아버지께 뭘 좀 여쭤봤으면 하는데요. "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내놓고는 마주 앉게 하십니다.
나는 봉황새 얘기를 꺼냈습니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얘기를 듣고도 할아버지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냥 빙그레 웃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 정말 그런 새가 있을까요? 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거든요. "
"...허허허. 있을지도 모르지요. "
나는 그말을 놓칠새라,
" 그러면 할아버지도 그 새를 보셨나요? "
" 봤지, 암.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현아만큼 어렸을 적엔 봤습지요. 그땐 몇 며칠동안 무지개도 잡으러 다녔으니 말야, 허허허. "
나는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의 말이 전혀 터무니없이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깜박 잊고 있던 기억의 한 실마리를 잡은 듯 할아버지의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드는 것이었습니다.
" 현아 선생님. 무얼 꼭 눈앞에서 봐야만 믿는 사람들 눈에는 늘 보이는 그것이 그것이란 말야. 우리들 시각이라든가 청각보담 때론 우리 마음이 훨씬 잘 보이고 잘 들을 수가 있거든. 그런 마음이란 아무나 쉽게 가질 수가 없는, 정말 행복을 타고난 사람들의 것이지. 우리 현아가 아마 지금 그런 모양이야. 하지만 걱정할 일은 못 돼. 전자오락이나 텔레비전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난 더 걱정이 된다오. "
이렇게 말씀하시며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내 머리 위의 새장을 가리켰습니다. 몸통이 연한 하얀색이고 아랫배가 약간 푸른 색을 띤, 부리가 붉은 예쁜 새가 한쌍 다정하게 깃을 접고 앉아 있었습니다.
" 저 새가 바로 백문조지요. "
할아버지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말을 이으셨습니다.
" 그러니까 두 달 전쯤일 겝니다.현아가 백문조를 한쌍 달라고 조르기에 마지못해 주었더니,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 새들이 그만 죽어버렸어요. 녀석이 상심하는 꼴이란 이 할애비가 봐도 여간 딱해 보이질 않았습니다. 문조를 한쌍 더 주마 해도 여전히 슬퍼만 했으니까요.그래서 그애한테 용기를 주기 위해 죽지 않는 새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선생님도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봉황대가 봉황새의 알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지요. 봉황대뿐만 아니라 경주에 있는 고분들이 모두 봉황새의 알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알들을 지키기 위해 봉황새가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구만리 장천을 날으면서도 줄곧 내려다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얘기뿐이었더라면 그 애가 그처럼 기를 쓰며 봉황새를 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내가 현아만 했을 때 얘기를 더 들려줬습지요. 제가 어렸을 땐,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있는 에밀레종이 봉황대 옆의 남문에 매달려 있었어요. 아마 선생님도 잘 아실테지만 에밀레종에 얽힌 슬픈 얘기가 있질 않습니까.남문에 매달린 에밀레종이 아침 저녁으로 울릴 때마다 난 꼭 종속에 갖혀 있는 봉덕이가 살아나서 봉황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듯했습지요.허허, 늙은 것이 무슨 망령든 소리를 하느냐 하실지 모르지만, 이렇게 지껄이다보니 다시 그예전으로 돌아간 듯싶군요.그건 그렇고 어느 날, 마침내 봉황새를 봤더란 말입니다. 봉황대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다 깨어나 보니 봉덕이를 태운 봉황새들이 어울어져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지요...... . "
할아버지의 얼굴엔 따스하고 인자한 빛이 환히 감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다 보니 세살이나 네살 적에 세상을 보던 그런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생생한 기운을 띠고, 국화꽃잎 하나 하나가 소근소근 얘기를 나누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마치 정다운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리고, 길게 비쳐드는 햇빛 줄기 줄기가 금방이라도 살아 푸드득거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현아에게 들려주었더니 그 애의 눈에서 금방 생기가 돌더군요. 백문조가 죽은 것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 꿈이 그 애의 눈에 가득차기 시작했지요. "
이때 유리문이 열리고 부부인 듯싶은 젊은 남녀가 들어오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얘기를 끊으셨습니다.젊은 부부는 잉꼬 한쌍을 샀습니다. 할아버지는 새 모이를 갈아 넣어주시며 잉꼬부부에게 뭐라고 속삭이고는 손을 가볍게 흔드셨습니다. 잉꼬부부는 눈을 끔벅거리며 무척 서운한 듯 몇번 꾸릉거렸습니다.
젊은 남녀가 새장을 들고 나가자 할아버지는 다시 얘기를 계속하십니다.
" 그때부터 현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봉황대에 올라갔습지요.그렇지만 난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봉황새를 봤는지 아직 보지 못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그러나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일을 깨끗이 잊어버릴 겁니다. 그런 것이 아이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을수록 사람의 마음은 살찌게 된답니다. 생각해 보십쇼. 눈앞엣 것만을 꼭꼭 믿는 아이들이란 이 세상을 얼마나 삭막하게 할 것인가를...... . "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시며 일어나 뒷문 쪽으로 걸어가십니다. 나는 마치 자석에라도 끌려가는 듯 그 뒤를 따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뒷문을 열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 선생님이 올라 가 보십시오. 지금 봉황새를 보고 있을 지도 모르니 살금살금...... . "
작은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봉황대 위에는 현아가 꿈을 꾸는 듯 비스듬히 앉아 있습니다.
나는 혼자 뒷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웃으시며 살그머니 안으로 문을 끌어닫습니다.
나는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텃밭을 지나면서 감나무가지에 매달린 홍시처럼발갛게물들어져 가는 땅바닥을 내려다보았습니다.그러고 보니 벌써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모양입니다.
나는 대밭을 헤치고 현아 쪽으로 곧바로 올라가려다 할아버지가 "살금살금" 이라시던 말씀이 떠올라 쿡쿡 웃음을 참으며 빙 둘러 뒤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금빛으로 물든 잔디 위로 바람이 불 적마다 쐐기풀이 너풀거립니다. 현아의 등이 점점 크게 보입니다.나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습니다.아래를 내려다 보니 시내의 곳곳에 봉황대처럼 우뚝우뚝 솟은 고분들이 꿈덩어리처럼 앉아 있습니다. 그 위로 저녁햇살이 번쩍거리고, 점점 짙은 놀빛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내가 현아의 등 뒤로 막 다가서서 서산 마루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나는 두눈이 휘둥그래져 꼼짝 않고 멈춰 서 버렸습니다.
서산마루 위에는 커다란 두 마리 새가 날개짓을 치고 있었습니다.
빨강 초록 노랑 하얀 색이 범벅이 되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날개가 서로 엉클리며 꽃구름이 둥둥 날개 깃털마다 매달려 춤추고 있었습니다.
나는 놀인지 무엇인지 모를, 그 새들이 우는 울음소리를 꿈결처럼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빛에 물들어 가는 작은 현아의 등 뒤에 서서, 점점 어떤 다른 세계로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