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좀 엉뚱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 서두만을 대하고도, 원 나이가 얼만데 아직까지 아름다움 운운한담, 하고 얼핏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으로서는 그런 오해를 무릅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문학을 삼의 어떠한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그것에 끌려다니던 문학 청년 시절의 탐미주의부터 비롯하여, 머지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껏 아름다움 따위를 찾는다면, 남들에게 철이 없거나 얼마쯤 덜떨어지게 보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줍잖게 고백하건대, 십 년 가까이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채 거의 절필 상태에서 지내다가 가까스로 다시 시작할 작정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모르기는 해도 쉰 가까운 나이에 아름다움 운운하는 삶이란 결코 평탄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이란 평탄하기는커녕 고작해야 자기혐오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치 욕지기처럼 치밀어오르는 어떤 혐오감 없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눈뜬 것이 언제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짐작하건대, 그 시기는 내가 처음으로 자기 혐오에 빠졌던 무렵과 겹쳐 있다는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아름다움이나 자기혐오란 결국 같은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내 낡은 사진첩에는 태어나서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의 사진이라고는 거의 없다. 고작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졸업기념 사진뿐인데, 거기에서도 내 얼굴은 찾아 낼 수가 없다. '6학년 2반 졸업기념'이라는 글이 들어 있는 국민학교 졸업사진에는, 시골학교답게 낮은 지붕의 교사와 드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예순 명 남짓한 아이들이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들뜬 표정들 가운데 단 한 군데만이 날카로운 면도날 자국을 남긴 채 지워져 있다. 면도날 자국이 바로 내 얼굴인 셈이다. 중학교의 졸업사진에도 내 열굴은 면도날 자국으로 남아 있다.
삼십 년이 훨씬 지나 버린 지금까지도 에의 사진을 대하면 나는 얼핏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면도날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흐린 삼십 촉짜리 전등 아래서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는 모든 사진을 찢고 있는 사춘기 무렵의 소년을 떠올린다. 그 소년의 떨리는 손이 마침내'6학년 2반 졸업기념'을 집어올리고, 차마 해맑게 웃는 동무들의 모습은 찢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얼굴만 지운 채 남겨두는 여린 마음까지 되살아오면, 나는 이번에는 얼굴이 아니라 바로 가슴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면도날을 느낀다.
이제 막 풋물이 오르는 사춘기의 소년에게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은 아니었을까.
\"얘, 아가, 이리온.\"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불렀다. 기생집인 춘향관 대문 옆 모퉁이였다. 이제 막 장터의 빈 가게들을 휩쓸며 '도둑놈 순사'를 끝낸 뒤라 아이의 목구명에서는 아직도 가쁜 숨과 함께 단내가 풍겨나는 참이었다.
\"왜, 왜 그란디요?\"
아이는 다가서는 대신에 한 걸음 물러서며 재빨리 누군가의 행색을 살폈다. 어둠에 익숙해 있던 아이의 눈은 일별에 사내의 신분을 알아 내었다. 적어도 촌놈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왜놈순사처럼 도리우찌 모자에다 당꼬바지를 입은 것으로 보아 건달패거나 노름꾼, 어쩌면 쓰리꾼 오야봉인지도 몰랐다. 아이는 여차하면 달아날 작정으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내가 아이를 좇아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비로소 사내의 얼굴이 춘향관 대문의 전깃불에 드러났다. 사내가 쓰리꾼 오야봉처럼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어서 아이는 얼마쯤 안심했다.
\"니가 대운이냐?\"
사내가 뜻밖에 아이의 이름을 대었고,
\"그란디요?\"
아이는 놀라며 반문했다. 사내는 그런 아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바지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아나, 이거.\"
\"그것이 뭔디요?\"
아이가 되바라지게 물었고,
\"어른이 받어라면 공손하게 받어야제.\"
사내가 아이를 나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쉽게 사내에게 말려들지 않았다.
\"피이, 누가 모를 줄 알고… 그거 주고 딴 심바람 시킬라고 그라제라우?\"
\"허어, 고놈 참. 심바람 안 시킬텡께 받어.\"
아이가 어렵사리 의심을 푼 다음에 손을 내밀었고, 사내가 쥐어 주듯이 아이의 손에 무엇인가를 건넸다. 바삭거리는 셀로판지 속에 든 그것은 색동양말이었다.
\"오메, 이건 내 껀디....\"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함박꽃처럼 벌렸고, 사내 또한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좋냐?\"
\"야우, 그랑께. 이 양말 참말로 나 준 거지라우?\"
아이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갖가지 색깔이 층층이 겹친 색동양말을 보며 다시 확인을 했다.
\"그렇당께. 공부 잘 허라고 주는 거이다 잉?\"
\"피이, 나는 아직 핵교 안 댕긴디.\"
아이가 반박을 했고, 사내는 일순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허헛... 담에 핵교 가먼 말여.\"
\"낼 설 쇠먼 봄에 핵교 가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