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활화산
옛날 옛날 한 엣날, 깊은 산속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산에 가서 밭을 갈고 있는데 너구리 한마리가 튀어나
와 귀찮게 방해했습니다. 다음 날도 너구리가 나타나 귀찮게 굴었습니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그 다음날, 너구리가 앉는 돌에 끈끈이를 발라 놓았습
니다. 너구리는 그것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씨 뿌리는 것을 방해하러 또 나
타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쟁기를 들고 쫓아 가자 너구리는 팔짝 뛰어 끈끈이
가 찰싹 달라붙어 꼼짝달싹 못하게 된 너구리는 할아버지한테 붙잡혀 호되
게 얻어맞은 뒤에 등나무 덩굴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너구리를 집에 데리고 돌아와 문에 매달면서 말했습니다.
"할멈, 저녁 때까지 이녀석을 푹 삶아 너구리국을 끓여줘."
할머니가 뜰에서 벼를 찧고 있으려니까 너구리는 가련한 목소리로 애원했
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너구리국만은 면하게 해 주세요. 살려주시면 감사의 뜻
으로 벼 찧는 걸 도와드릴테니 빨리 이 덩굴을 좀 풀어 주세요."
할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흐음, 너구리 주제에 기특한 소리를 하는군. 이 덩굴을 풀어주면 아마도
나를 때려죽이고 할머니국을 끓여 영감에게 먹일 셈이지?"
너구리가 울면서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며 계속해서 귀찮게 간청했기 때문
에 할머니는 믿는 척하고 덩굴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벼가 다 찧어있
는지 절구 속을 들여다 보라고 말하고 너구리가 절구 속을 들여다 보는 순
간, 절구공이로 머리를 때려 죽였습니다. 할머니는 너구리 가죽을 벗기고
너구리국을 땛여놓고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할아버지가 산에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가 어서 너구리국
을 먹어보라고 권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입 먹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좀 이상한 맛이 나는데."
그리고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는
데, 그 눈빛을 본 할머니도 자신이 마치 괴물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소름
이 오싹 끼쳤습니다.
"그건 분명히 너구리가 끊을 때 괴로워서 방귀를 뀌었기 때문일 거예요."
할머니는 되는대로 말을 둘러댔습니다.
"아니 됐어. 그래도 맛있는 걸."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주는대로 너구리국을 세그릇이나 먹었습니다. 그때
토끼가 찾아왔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너도 너구리국을 먹어보렴."
할머니가 말을 하자 토끼를 펄쩍 뛰면서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교활한 너구리 할망구."
토끼는 계속해서 떠들어댔습니다.
"할아범이 할머니국을 먹었다. 할아범이 할머니국을 먹었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토끼야 그게 무슨 소리니?"
"저건 할머니를 죽이고 할머니로 둔갑한 너구리에요. 할아버지가 먹은 것
은 할머니국이라구요."
말을 마친 토끼는 문에 결려 있는 너구리 가죽을 홱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도망가면서 할머니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제 너구리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걸."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허둥대는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정말 무서워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식칼을 들고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너를 너구리국으로 만들어 주마."
할머니는 엉겁결에 빌었습니다.
"너구리국만은 면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겉잡을 수 없을 만치 화가 나서 닥치는대로 식칼
을 휘둘렀습니다. 할머니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산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할
아버지는 쫓아가다가 도중에 발목을 접질러서 맞은편 산에 있는 토끼에게
부탁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할멈으로 둔갑한 너구리를 혼내줘서 원수를 갚아 다오."
"할멈은 여기 있어요. 너구리는 먹어 버렸다구요."
할머니가 외쳤지만 겨울 산에는 메아리소리 외에 아무대답도 들려오지 않
았습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산길을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토끼가 땔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아까는 그렇게 심한 거짓말을 잘도 하더구나."
토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습니다.
"앞산의 토끼는 앞산의 토끼. 내가 알 바가 아녜요."
할머니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했습니다. 토끼는 땔나무를 잔뜩 잘라다가 선물을 하면
할아버지의 의심도 풀리지 않겠느냐고 지혜를 짜내 알려주었습니다. 할머니
는 뛸듯이 기뻐하며 척척 땔나무를 잘라 토끼의 도움을 받아 산더미만큼 등
에 짊어졌습니다.
산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토끼가 부싯돌로 딱딱 불을 일으켰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뒤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건 딱딱새의 딱딱새가 우는 소리예요."
토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땔나무에 불을 붙여
서, 활활 피웠습니다.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이번에는 활활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냐?"
"그건 활활산의 활활새가 우는 소리예요."
토끼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그대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윽고 등
에 짊어진 땔나무가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등쪽이 점점 뜨거워졌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제서야 토끼에게 속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등에 큰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끙끙 신음을 하면서 산을 넘다보니, 토끼가
양지바른 곳에서 여뀌(식물의 일종)로 된장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아까는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더구나. 덕분에 큰 화상을
입었단다."
"딱딱산의 토끼는 딱딱산의 토끼. 여뀌산의 토끼는 여뀌산의 토끼. 나는
모르는 일이예요."
할머니는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고서 이번에는 여뀌된장을 보고 물었습니
다.
"그건 무엇이냐?"
"이건 여뀌된장이라는 것인데, 화상이나 자상에 잘 듣는 약이예요."
할머니는 그 말을 곧이 듣고서 토끼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거 마침 잘 됐구나. 등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그 여뀌된장을 좀 발라다
오."
토끼는 쾌히 승낙하고 듬북 찍어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뀌된장이 화
상에 스며들어서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아파서 할머니는 데굴데굴 굴렀습
니다.
"토끼야, 토끼야. 아파서 견딜 수가 없구나."
할머니는 울부짖으며 아픔을 호소했지만 토끼는 이미 잽싸게 도망친 뒤였
습니다. 할머니는 또 속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계곡 물로 여뀌된장을 씻어내고 울면서 산을 넘어가고 있자니 이번에는 토
끼가 삼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아까는 잘도 나를 골탕먹였구나. 화상이 더
심해졌단다."
할머니가 나무라자 토끼는 시치미를 딱 잡아 땠습니다.
"여귀산의 토끼는 여뀌산의 토끼. 삼나무산의 토끼는 삼나무 산토끼. 나는
모르는 일이예요."
할머니는 토끼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토끼야, 삼나무는 베어서 뭘 할 셈이냐?"
"봄이 와서 바다도 잔잔해졌으니가 이 삼나무로 배를 만들어 바다에서 고
기를 낚을 거예요."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자기도 끼워 달라고 했습니다. 토끼는 삼나무로
자기 배를 만들고, 할머니한테는 진흙으로 진흙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할머니와 토끼는 곧바로 바다에 나가 배를 띄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에
나갔을 때, 토끼는 노래를 부르며 삼나무 배의 뱃전을 노로 두들겼습니다.
할머니도 흉내를 내서 진흙배의 뱃전을 노로 두들겼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배에 금이 가서 물이 들어오는구나."
"더 세게 두들겨요. 크게 금이 생겨서 물이 콸콸 들어오면 고기도 함께 들
어올테니까요."
할머니가 토끼의 말대로 뱃전을 세게 두들기자 이윽고 배가 부서져서 물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또 속았구나"하고 말할 틈도 없이 배
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잠시 후 토끼는 죽어서 떠오른 할머니를 배에 끌어올리고 나서 서둘러 할
아버지를 부르러 갔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 이제 울지 마세요. 못된 너구리는 바다에 빠져 죽었어
요."
그리고 토끼는 할아버지와 함께 너구리국을 만들었습니다.
"토끼야, 이 너구리는 할머니의 모습이구나?"
할아버지가 미심쩍어 하면서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그건 너구리가 할머니로 둔갑했을 때 벗은 가죽을 제가 태워버렸기 때문
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그런거예요."
할아버지는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고 너구리국인 줄 알고 할머니국을 잔뜩
먹었습니다.
"아까 먹은 할머니국은 이상한 맛이 났는데, 진짜 너구리국은 정말 맛있구
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난생 처음 먹어보는구나."
몇그릇씩이나 계속 할머니국을 먹어서 결국 남비 속에는 뼈만 남게 되었습
니다. 할머니가 두개골을 건져올리자 토끼가 부추겼습니다.
"얄미운 너구리의 최후예요. 이걸 힘껏 깨물고 또 깨물어주는 게 좋지 않
겠어요?"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두개골을 여송연을 깨물듯이 질근질근
씹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할아버지의 이빨은 모조리 다 빠져 버렸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이게 어찌된 일이냐? 내 이빨이 모조리 빠져 버렸구나."
할아버지가 불평을 하자 토끼는 킬킬대고 웃으면서 머리에서 토끼 가죽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너구리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깜작 놀
란 할아버지에게 너구리는 말했습니다.
"나는 앞산의 너구리이고, 딱딱산의 너구리이며, 여뀌산의 너구리이고, 삼
나무산의 너구리다. 아우의 원수는 이제 갚았다. 할머니국을 먹게 했으니
까."
너구리는 말을 끝마치고 산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할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서 마침내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