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이는 청계천 세운 상가 뒷길의 전기 용품 도매상의 꼬마 점원이다.
수남이란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꼬마로 통한다.
열여섯 살이라지만 볼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토실하니 붉고,눈 속이 깨끗하다.
숙성한 건 목소리뿐이다.제법 굵고 부드러운 저음이다.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면 점잖고 떨떠름한 늙은이 목소리로 들린다.이 가게에는 변두리 전기 상회나 전공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잦다.수남이가 받으면,
"주인 영감님이십니까?"하고 깍듯이 존대를 해 온다.
"아,아닙니다.꼬맙니다."수남이는 제가 무슨 큰 실수나 저지른 것처럼 황공해하며 볼까지 붉어진다."짜아식,새벽부터 재수 없게 누굴 놀려.너 이따 두고 보자."
이런 호령이라도 들려 오면 수남이는 우선 고개를 움츠려 알밤을 피하는 시늉부터 한다.설마 전화통에서 알밤이 튀어나올 리는 없는데 말이다.실수만 했다 하면 알밤 먹는 것을 예상하고 고개가 자라 모가지처럼 오그라드는 게 수남이게 이 곳 전기 상회에 취직하고 나서부터 얻은 조건 반사다.
이 곳 단골 손님들은 우락부락한 전공들이 대부분이어서 성질들이 거칠고 급하다.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수남이가 빨리 알아듣고 척척 챙기지 못하고 조금만 어릿어릿하면 '짜아식'하며 사정없이 밤송이 같은 머리에 알밤을 먹인다.
수남이는 그 숱한 전기 용품 이름을 척척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숱한 알밤을 먹었다.그런데 일에 익숙해진 후에도 수남이는 심심찮게 까닭도 없는 알밤을 얻어 먹는다.이 거친 사내들은 그런 짓궂은 알밤으로 수남이를 귀여워하는 것이다.예쁜 아이를 보면 물어뜯어 울려 놓고 마는 사람이 있듯이,이 사내들은 그런 방법으로 수남이에게 애정 표시를 했다.
"짜아식,잘 잤냐?"
"짜아식,요새 제법 컸단 말이야.장가들여야겠는데,짜아식 좋아서..."
그리곤 알밤이다.주먹과 팔짓만 허풍스럽게 컸지,아주 부드러운 알밤이다.
그러니까 수남이는 그만큼 인기 있는 점원인 셈이다.수남이는 단골 손님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주인 영감에게도 여간 잘 뵌 게 아니다.
누구든지 수남이에게 알밤을 먹이는 걸 들키기만 하면 단박 불호령이 내린다.
"왜 하필 남의 머리를 쥐어박어?채 굳지도 않은 머리를.그게 어떤 머린 줄이나 알고들 그래,응?공부 많이 해서 대학도 가고 박사도 될 머리란 말야.임자들 같은 돌대가리가 아니란 말야."그러면 아무리 막돼먹은 손님이라도 선생님 꾸지람에 떠는 초등 학생처럼 풀이 죽어서 수남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그리고는,"꼬마야,그럼 너 요새 어디 야학이라도 다니니?"하며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까지 보였다.그러면 영감님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아니,야학은 아무 때나 들어가나.똥통 학교라면 또 몰라.수남이는 내년 봄에 시험 봐서 들어가야 해.야학이라도 일류로,그래서 인석이 그저 틈만 있으면 책이라고.허허...."
수남이는 가슴이 크게 울렁인다.수남이는 한 번도 주인 영감님에게 하다못해 야학이라도 들어가 공부를 해 보고 싶단 말을 비친 적이 없다.맨손으로 어린 나이에 서울에 와서 거지도 안 되고 깡패도 안 되고 이런 어엿한 가게의 점원이 된 것만도 수남이로서는 눈부신 성공인데,벼락맞을 노릇이지,어떻게 감히 공부까지를 바라겠는가.그러면서도 자기 또래의 고등 학생만 보면 가슴이 짜릿짜릿하던 수남이다.처음 전기 용품 취급이 서툴러 시험을 하다 툭하면 손 끝에 감전이 되어 짜릿하며 화들짝 놀랐던 것처럼,고등 학교 교복은 수남이의 심장에 짜릿한 감전을 일으키며 가슴을 온통 마구 휘젓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런 수남이의 비밀을 주인 영감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수남이는 부끄럽고도 기뻤다.그래서 수남이는 "내년 봄에 시험 봐서 들어가야 해.야학이라도 일류로....."할 때의 주인 영감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그까짓 알밤쯤 하루 골백 번을 맞으면 대수랴 싶다.그런 소리를 자기를 위해 해 주는 주인 영감님을 위해서라면 뱃골이 부러지게 일을 한들 눈꼽만큼도 억울할 것이 없을 것 같다.월급은 좀 짜게 주지만,그 감미로운 소리를 어찌 후한 월급에 비기겠는가.수남이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고단하지만 행복하다.
내년 봄-내년 봄은 올 봄보다는 멀지만 오기는 올 것이다.그리고 영감님이 잘못 알아서 그렇지 시험 볼때는 봄이 아니라 겨울이다.겨울은 봄보다 이르다.
수남이는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밤에는 가게 방에서 숙직을 한다.꾀죄죄한 다후다(합성 섬유의 한 종류) 이불에 몸을 휘감고 나면 방바닥이야 차건 더웁건 잠이 쏟아진다.그럴 때 "인석은 그저 틈만 있으면 책이라고."하던 주인 영감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수남이는 낮 동안 책은커년 신문 한 귀퉁이 읽은 적이 없다.도대체가 그럴 틈이 없다.점원이 적어도 세 명은 있어야 해 낼 가게 일을 혼자서 해 내자니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그래도 수남이는 혹사당하고 있다는 억울한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어쩌다 남들이 영감님에게,"꼬마 혼자 데리고 벅차시겠습니다.좀 큰 애 하나 더 쓰셔야죠."
영감님은 그런 소리를 제일 싫어한다.벌레라도 씹어 먹은 듯이 이상 야릇한 얼굴로 상대방을 흘겨보며,"누가 뭐 사람 더 쓰기 싫어 안 쓰나.어디 사람 같은 놈이 있어야 말이지.깡패 놈이라도 걸려들어 봐.우리 수남이가 물든다고.이런 순진한 놈일수록 구정물 들긴 쉽거든."얼마나 고마운 주인 영감님인가.이런 고마운 어른을 위해 그까짓 세 사삼이 할 일 혼자 못 할까 하고 양팔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한다.그런 고마운 어른이 보지도 않는 책을 틈만 있으면 본다고 남들에게 자랑을 한 뜻은 밤에라도 잠만 자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두라는 뜻일 것이다.수남이가 그렇게 풀이한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면 눈이 말똥말똥해지며
잠이 저만큼 달아난다.혹시나 하고 보따리 속에 찔러 가지고 온 중학교 때 교과서랑 고등학교까지 다닌 형이 쓰던 참고서 나부랭이를 이렇게 유용하게 쓸 줄은 정말 몰랐었다.책이라야 통틀어 그것뿐이다.주인 영감님이 심심할 때 사 본 주간지 같은 것이 굴러다닐 적도 있어서 소년다운 호가심이 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인석이 그저 틈만 있으면 책이라고."하며 주인 영감님이 가리키는 책이란 결코 주간지 조각이 아닐 것이라느 영리한 짐작으로 수남이는 결코 그런 데 한눈을 파는 법이 없다.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가게를 닫고 셈을 맞추고 주인 댁 식모가 날라 온 저녁을 먹고 나서 혼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열한 시 경이다.그 때부터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수남이는 이 동네 가게의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수남이의 부지런함은 이 근처에서도 평판이 자자했다.제일 먼저 가게 문을 열고,물뿌리개로 골목길에 물을 뿌리고는 긴 골목길을 남의 가게 앞까지 말끔히 쓸고 나서 가게 안 물건 먼지를 털고,어떡하면 보기 좋을가 연구를 해 가며 다시 진열을 하고 제 몸단장까지 개운하게 끝낸다.그제야 주인 영감님이 나온다.
주인 영감님은 만족한 듯 빙긋 웃고 '짜아식'하며 손으로 수남이의 머리를 더듬는다.그러나 알밤을 먹이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따뜻하고 큰 손으로 머리를 빗질하듯 두어 번 쓸어내려 주고는,부드러운 볼로 해서 둥근 턱까치를 큰 손바닥에 한꺼번에 감쌌다가는 다시 한 번 '짜아식'하곤 놓아 준다.수남이는 그 시간이 좋다.그래서 남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육친애에 철모르고 푸근히 감싸여야 할 나이다.그를 실제 나이보다 어려 뵈게 하는,아직 상하지 않은 순진성이 더욱 그에게 육친애를 목마르게 한다.
주인 영감님의 든든하고 거친 손에서 볼과 턱을 타고 전해 오는 따뜻함,훈훈함은 거의 육친애적이었고 그래서 수남이는 그 시간이 기다려질 만큼 좋았고,
꿀같이 단 새벽잠을 떨쳐낸 보람을 느끼고도 남을 충족된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