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그 작품성에서 한국 단편 문학의 한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이 작품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단편 선집들과 문학 교과서에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무수한 단편들 중에서도 왜 유독 "메밀꽃 필 무렵"에 쏟아지는 찬사가 막대한지? 이 책을 읽어 본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찬사로 점철된 어리숙한 비평이나마 내 나름대로의 작품평을 이 자리에서 펼쳐 보고자 한다.
이 얘기는 내용 면에서 보면 인간 본성의 애욕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허생원과 반평생을 함께 해 온 그의 분신과 같은 당나귀. 그러나 작가는 암캐만 보면 발광을 한다는 볼품 없고 비루먹은 당나귀의 특성과 외양을 충줏집을 마음에 두고 나어린 동이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볼품 없고 늙수그레한 허생원의 모습과 오버랩시켜 짐승과 인간의 성에 대한 욕망이 결국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이란 것들은 알고 보면 짐승과 다를 게 없어! 라고 고소하는 듯. 그러나 그렇게 비하된 허생원의 애욕은 젊은 시절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의 추억으로 다시금 얼마간의 체면을 차리고 미화된 모습으로 변모한다. 밤을 새워 다음 장으로 향하며 젊은 시절 성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하룻밤을 지샜던 일을 회상하는 허생원. 장돌뱅이에게는 추호도 없을 줄로만 알았던 일이었다며 조선달과 동이에게 아름답고도 애틋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성에 대한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착상에 연연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곧 문학에서 매양 낡아빠진 도덕행위들을 폐하고 새로운 길에의 구축을 추구해 왔던 것처럼, 그도 그 사회의 낡은 인습과 폐쇄성에 도전했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한 작가의 의도는 다시금 새로이 그의 수려한 문체로 눈을 돌려 길을 따라 한층 고조된 달밤을 걸어간다. 이지러지는 달의 형태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흐붓한 달빛은? 곁의 누구 하나 똑 떨어지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표현을 이해 못해 사전을 찾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문학의 맛, 이효석 문학 특유의 멋이 자연스레 넘쳐나는 것이다. 그다지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영상으로 멋스럽게 다가오는 우리네 달밤의 풍경이 머리 속을 채우고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그림 찾기 식 표현방식에 작가의 안목을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부 평론가들은 이러한 시적인 표현들을 관념적 허장성이라 비난을 했다는데 수식이 전부인 중국의 고문을 비교해 볼 때 그것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진정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표현에서는 우리만이 느끼고 우리만이 감동 받게 되는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절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공감.
개울을 건너는 장면을 본다. 건너다 발을 헛디뎌 동이 등에 업혀 건너가는 허생원. 개울을 지나 동이의 왼손에 들린 채찍이 눈에 뜨이고, 그의 등에서 내려오기 아쉬워하는 그. 과학적으로 왼손의 유전확률이 근거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웬지 모를 여운마저 심어주는 작가의 수법에 넘어간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야릇하기까지 한 결말. 허생원과 동이가 부자사이일 것이라는 독자의 예상에 더 이상의 힌트는 없다며 서둘러 맺어 버린 작가. 아마도 치밀한 계산 속에 이루어진 구성임을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으리라.
이렇게 나의 이 분석과 비평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굉장히 어리석고 무모한 듯도 하지만 내게는 적어도 유효석이라는 인물의 위대함과, 사람들의 인식 또는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유효석 문학의 우수성을 살갗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새로운 기회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효석 그 만이 할 수 있는 인간심리의 세밀한 묘사와 자연에 대한 존경스러울 만치 유려한 배경묘사, 그 둘 사이의 절대적인 함수관계에 다만 무릎을 꿇은 나는 범 앞의 하룻강아지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가시를 돋운 어린 왕자의 장미 마냥 또다시 무한의 감동 속에 잠수하며 비평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