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길에서 상아를 만났다’를 읽고
김전한의 장편 소설 ‘은행나무 길에서 상아를 만났다’를 읽었다. 그야말로 숨가쁘게 읽는다는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은 심정이었다.
아기자기하게 끊임없이 밀려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책을 잡자 마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장편소설을 이렇게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내 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분명히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인 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청산유수로 흘러가는 재미있는 입담을 듣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화라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글 때문에 입는 화, 筆禍를 연상시킨다. 글을 이야기로 바꾸면 주인공의 삶은 ‘이야기 때문에 입는 화’로 점철된 인생이다.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이야기꾼으로 타고나는 것은 ‘저주받은 운명’임이 드러난다.
성장소설의 공식은 대개 ‘행복한 유년- 흔들리는 사춘기- 고통의 세월을 거쳐 성장이 완성되는 청년기’로 이루어진다.
소설 ‘은행나무 길에서 상아를 만났다’도 역시 이 공식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다만 주인공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사건들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소설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와아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싶은 놀라움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나는 이야기 그 자체’ 라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주인공의 성장은 곧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성장과 같다.
특히 이 소설의 작가는 매우 하찮은 대상들, 세상에 쓸모 없어 보이는 대상들을 이야기 속에 불러들여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가령,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이 꺼려하는 방구 마저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한참동안 이야기를 끌고 갈때는 햐아 작가의 상상력이란 끝이 없구나 싶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디 방구 뿐인가, 발가락의 때, 하품, 욕설 마저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의 중심속에 넣어놓고 사건은 전개되어갔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아 나는 여전히 세상에 살만한 가치가 있구나 싶은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천상의 선녀가 저주받아서 이 세상에 떠돌아 다니는 거지 여자로 바뀌고 은행나무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행을 떠나고 하여튼 이야기들은 종횡무진을 뻗어나가는 소설, ‘은행나무 길에서 상아를 만났다’ 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재미 있는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재미 있는 이야기란 바로 이런것이구나’ 로 바꾸어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