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할 줄 모르는 사람들..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는 뭐랄까.. 짧막하게 말하면 그는 정말 천재적이다.
나는 이제까지 줄곧 독서를 해오면서 헤세의 작품만큼 크나큰 감명을 받은 작품도 거의 드물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문체나 상상력 그리고 사상이 매우 탐이 난다.
그는 대부분 잠재의식이라거나 자아에 관련된 글을 자주 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데미안이요, 나는 그 책을 줄곧 읽어 오고 있고 또 아직도 연구대상이다.
이런 내게 또다른 헤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다.
서론이 너무 길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책의 줄거리는 지금의 우리 현실과도 과히 비슷하다.
갑자기 묻는다. 우리는 생애 얼만큼 휴식을 취하고 있을까?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너무 모르고 무시하고 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시간에 쫓기어 바쁨에 채찍질 당하고 있는 한마리의 조랑말과도 같은 신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항상 시간에 쫓기어 앞만 바라보고 있다.
아마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녹초가 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테니까."
수레바퀴란 무엇일까,
돌아오지 못할 시간? 후회? 아니면 운명?
서로마다 이것에 대한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수레바퀴란 인생에 대해서의 잠시 동안의 방황이라고 느낀다.
모든 인간은 적어도 한번쯤 수레바퀴에 깔리게 된다.
왜냐하면 수레바퀴는 굴러가니까.
여기서 인간이 한번쯤 경험하기 마련인게 바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시절. 사춘기를 말한다.
이 수레바퀴 밑에서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친구 하일러를 만나 내면의 흔들림을 느끼게 된다.
곧 이 이야기는 한스 기벤라트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수레바퀴에 될 수 있음 깔리고 싶어하지 아니한다.
하지만 나는 뭐랄까.. 이 수레바퀴에 대한 뜻모를 감정을 가지고 있다.
혹시 깔리면 깔릴수록 인생을 더 깨닫게 되는 상상의 매개체가 혹시 이 수레바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이건 내 자그마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에 대한 다면(내 생각에 의한다면) 헤르만 하일러는 수레바퀴에 몇번이고 깔려본적이 있는 학생이다.
그는 가히 천재적인 시인이다. 다만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고 또 이 세상에 비해 너무 많이 낭만적이라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두 사람들이 조용히 방안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한편, 그 이후 한스는 하일러에게 받은 영향으로 수레바퀴 밑에 한번 깔리는 것에 이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다시 한번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된다.
한스의 주변사람들은 서로 대립된 생각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바로 한스 마을의 교회 목사님과 구둣방 아저씨의 영향이다.
이 두사람은 가치관이 매우 다르다.
목사는 명예욕을 중시하고 구둣방 아저씨는 성실히 사는 것.. 즉 낙천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이에 대해 우유부단한 한스는 두 가지의 영향을 한꺼번에 받게 되고 그로 하여금 또 다시 수레바퀴에 깔린 것이다.
결국 한스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것에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리는데..
어떻게 보면 한스는 아버지와 주변사람들의 말과 영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을련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그 수레바퀴에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혹시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을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 앞만 보고 달려나갈 우리 인류의 모습을 미리 예견해 준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