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충격적이고 자조적인 문체의 몇 마디 고백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처음 접하자마자 묘한 공포로 이끌었다. 주인공 '나'는 매춘부인 아내에게 얹혀사는, 무능력하고 폐쇄적인 인물이다. 처음 '날개'를 읽었을 때, '나'는 그저 게으르고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 또한 결말 끝 부분의 '날개야, 다시 돋아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넘겨 버렸었다.
몇 번을 되새기고 반복해 보아도, 아직도 그의 소설의 깊이를 파악할 수가 없다. 표면에 드러난 것 밖에, 글귀 속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의식의 흐름이라든지, 심리 소설이라든지 어려운 용어와 함께 프로이트 이론까지 들고 설명하니, 나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이상의 소설을 멀리했고, '날개'라는 제목의 책은 먼지가 뿌옇게 쌓인 책장에 꽂혀 읽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대청소를 하다가 문득 작은 책 한 권이 큰 책들 틈에 끼어 옹송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감정이 실린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동정심이 들어 꼭 읽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먼지를 깨끗이 쓸어내고 대청소를 하는 동안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난해한 어구 속에서 나는 그 뜻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읽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 읽은 후, 내 나름대로의 정의와 일반적으로 해설된 의미를 비교해 보니,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전문적인 용어라는 것만 다른 거였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닌, 기생충처럼 아내의 집에 붙어사는 '나'와 아내. 전통적인 부부 관계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특이한 구성이다. 아내와 '나'는 거꾸로 된 종속 관계였다. '닭이나 강아지처럼' 주는 대로 먹고 자는 것이었다. 작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이불만 뒤집어쓰고 밤낮으로 잠을 자는 '나'의 모습도 읽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과 모멸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가장 괴로워하는 나에게 있어 그의 일상은 충분히 나의 비난을 샀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할 일이 없으면 혼자만의 공상의 세계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나'는 이불 속에서 공상을 즐겼고 아내가 주는 오십 원짜리 은화도 어디에 쓸 줄 모른다. 아내가 사다준 벙어리에 저축의 목적도 없이 한 푼 한 푼 떨굴 뿐이다. 그는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벙어리에 은화를 넣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내는 왜 그 돈을 놓고 가는지 쓸모 없는 가벼운 의문만 머릿속에 잠시 떠올리고는 무료하게 그저 벙어리 속에 은하를 떨구는 것이다. 그는 그 행동에조차 권태를 느끼고 꽤 많은 은화를 전부 변소에 버린다. 허무함만 느끼면서도 그 스스로 활력을 찾을 방법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밤외출이 있는 틈을 타 거리로 나간다. 그것이 유일한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그러나 주머니의 돈은 쓰지 않은 채, 아니 쓰지 못한 채 주머니에 고스란히 들어있고 그는 아무 의식과 목적도 없이 거리를 쏘다니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피로하다. 그리고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랫방의 아내와 낯선 남자에게 외출하다 온 것을 들키고 만다. 아내는 매우 화를 낸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 화를 낼 줄도 모른다. 아내의 매춘을 눈감아 주는 것도 아닌, 그저 아내의 일이라고만 여기고 그것에 대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그는 아내에게 사죄를 한다. 직접 말하는 것도 아닌 이불 속에서 혼자 입 속으로 되뇌이는 것이다. 그의 무력한 자아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아내는 감기에 걸린 그에게 아스피린이라며 최면제를 준다. 그는 아내가 주는 약을 받아먹고 한달 내내 잠만 잤다. 지금 생각해도 왜 아내가 그에게 아스피린이라고 속이며 수면제를 먹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그가 밤에 자기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의도였을까, 하고 짐작정도만 했다.
'나'는 아달린을 가지고 나가 아내에 대한 의혹을 품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자기가 잘못한 거라며 아내에게 사죄를 하기 위해 자시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다시 못 볼 것을 보고야 만다. 아내는 화가 나 '나'를 밀쳐내고 물어뜯는다. 하지만 '나'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저항도 하나 못하고야 만다. 아까 전의 아달린에 대한 의혹에 대해 말하려 해도,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그것조차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온다.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 '나'는 자신과 아내와의 부부 사이를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아내에게로, 다시 권태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고민을 하다,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그는 결정을 내린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구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구나.
처음에 이 말의 의미를 얼른 생각해내지 못했다. 날개. 하늘로 솟구치고 싶은 이상을 표현한 것. 그러나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그래서 날 수가 없다. 날고 싶은, 지상에서 벗어나고픈 꿈은 꿈일 뿐. '나'는 그 이상을 품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아내에게 빌붙어 살던 생활에서 벗어나 그토록 자신을 옭아매던 족쇄에서 풀려난다. 옥상 난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나는 방법' 말고도 다른 길은 없었을까. 하지만 나 역시,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무력함.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무서운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부터 인간은 하늘을 날기를 소망해 왔다. 하늘은 지상에서의 탈출이고 더 높은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다. 모든 이들이 곧은 직선같은 삶에서 한순간은 일탈을 원한다. 이상의 소설 '날개'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잠재적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