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녀를 낳는 것과 책을 남기
는 것이다.' 이 과제를 하며 내가 느낀 가장 커다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움베르
크 에코의 위대함이다. 물론 그의 책은 나의 수준을 능가하여 무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끝까지 다 읽지도 못할 정도로 쉽게 읽을 수만은 없는 역사소설이었다. 이
는 분명 그 중세시대의 배경지식이 모자란 탓이라 위로는 하였지만 그의 책은 읽은
부분을 또 읽고는 하는 나의 나쁜 버릇들을 자꾸만 들추어냈다. 내가 「장미의 이
름」의 내용을 진정으로 접하게 된 것은 수업시간의 영화감상이었다. 하지만 끝까
지 보기도 전에 난 중학교 시절 무심코 어느 영화의 뒷 장면을 본 기억이 되살아났
다. 바로 책의 독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그 하이라이트 부분이 하필 그때
생각나다니 참으로 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만큼 그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스테리 내용보다는 그 영화의 진정한 내용을 볼 수 있었던 듯 하다.
"죄 많은 내 인생도 만년에 이르러.... 난 수기를 쓰기로 했다. 1327년 젊은 날의
기이한 일...주여 내게 지혜를 주소서..." 영화는 아드조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내용
은 영국의 수도사 바스커빌의 윌리엄이,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도착하면서 끔찍
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사건 해결을 의뢰 받은
윌리엄은 그의 시자 아드소와 함께 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살인은 「요한 묵시록」
의 예언에 따라 진행되고, 윌리엄은 마지막 피해자가 죽을 때까지 살인을 막을 수
없었다. 사건은, 수도사들의 출입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장서관의 숨은 지배자인
명인 호르헤 수도원장의 흉계가 밝혀지면서 끝맺음된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사람
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미스테리 형식의 이 이야기는 미로 같은 이야기임에도 불구
하고 전체적 분위기는 아주 잔잔하고 무겁웠다.
무엇 보다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 생각난 것은 왜 이 영화, 아니 이 책의
제목이 '장미의 이름'이냐는 것이다. 영화 어느 곳을 보아도 장미에 대한 언급조차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뒤져본 결과 움베르크 에코 자신이 직접 제목에 대
해 언급한 것을 찾게 되었다. 장미의 상징적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이 아주 다양하며
이것을 통해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여 책에 대해 종잡을 수 없는 수많은 해
석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이 제목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장미자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제목 자체가 책과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말이 없다. 그의 소설은 이런 식으로 하나에서 열까지 어느
것 하나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책의 어느 장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간단한
예를 찾아보면 이 소설의 시간적 무대가 1327년 11월 말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바
로 12월이 되면 체제나의 미켈레는 아비뇽에 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1월
초순이나 중순은 좀 이르다고 하였다. 수도원의 불목하니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게
해야 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그래야 피 항아리에 시체를 거꾸로 처박을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시체는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야 하는가 하면 <요
<br/>한 묵시록>에 따르면,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이에 더 나아가 교수님의 해설에 따르면 기호학자인 그는 책의 곳곳에 여러
가지 기호를 숨겨 두었다. 예를 들면 도서관의 통로에 거울은 거울속 자신의 모습
을 보아야만이 열린다. 또한 주인공 굴리엘모 다 바스커빌은 <바스커빌의 개>를 연
상시키고, 아드조 다 멜크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왓슨을 연상시킨다. 이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움베릌 에코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인 것이
다.
이 책에 대해 조사 중 이런 서평을 읽게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 북 월드 - "놀라
운 마법......살인 사건과 기독교적 미스테리의 연금술적 결합. 죽어 가는 문화의 절
망을 훌륭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사랑과 종교, 학문과 정치 등 인간의 영원한 문제
를 다루고 있다." 라는 말을 보게 되었다. 참 거창한 표현이다. 미스테리의 연금술
적 결함이란 독극물이 묻은 책을 말하는 것이고 사랑과 종교라 하면 아드조와 마을
처녀의 사랑과 그에 대비되는 종교적 이념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인간
의 영원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책에서는 어떠했을지 모르나 영화로서 이
문제들을 심도 있게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그러한 지나친 전문성이나 역사
적 배경을 갖는 논쟁들, 묘사부들이 적당히 배제된 영화였기 때문에 내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죽어 가는 문화의 절망이라는 말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중세의 암흑시대' 라는 말은 나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말이다. 그도 그럴 것
이 중학교 시절부터 이 시대에 대해 공부할 때는 이 단어를 때어놓고 본 적이 없어
서이다. 그렇듯 중세의 유럽은 마치 우리나라의 불교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과 마찬
가지로 이 시기에 유럽은 기독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
적 색깔은 아주 어두웠다. 어떤 장면에선 사람의 움직임을 찾기 위해 화면을 뚫어
지게 쳐다보아야 했던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아
주 산골에 처박혀 있던 수도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음모, 타락, 부패, 폭력, 독선의 악취를 풍기는 이 수도원은 바
로 당대의 사회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소우주인 것이다.
영화속 살인의 동기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둘째권은 웃음을 다룬 희극
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상의 바탕이 된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이데아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사상이 받아 들여져 있었다. 윌리엄의 말처럼 독실한
신자와 광신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렇듯 반대되는 사상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
품, 희극론의 웃음이 공개되면 사람들은 웃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무거움이 없어지
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고 믿은 호르헤 수도원장은 모든 글씨를 독
극물로 필사해 놓았다. 여기서 호르헤 수두원장은 중세의 기독교적 모습을 대표한
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을 배제 아니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성의 개발을 억제
하였다. 하지만 영화속 수도원의 주요 장면 중 많은 부분은 옛 고서를 필사하는 수
도사들의 모습이었다. 또한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수도사들
의 설정들을 봄에 있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책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이
다. 영화 속 장면 중에 도서관에 불이나 피신하는 장면에서 윌리엄은 책을 꺼내기
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아드조가 그에게 묻자 그는 "이것이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
는 방법이다"라는 말을 한다. 책 속의 진실이 이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
는 것이다. 호르헤 수도사 역시 책속의 진실을 느꼈기 때문에 그토록이나 그 책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중세의 유럽은 "기독교권" 이라는 말로 자주 표현된다. 이 문명권은 기독교 교회
가 일정한 보편성과 일체성을 부여하였는데, 교회가 로마인의 언어 라틴어를 공용
어로서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제국과의 연속성을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
었다. 실로 고대 지중해세계의 문화적 전통은 중세 교회를 통해 전수되고, 보존되고
또 재해석되면서, 중세 특유의 문명을 형성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서방 기독교 문명권은 오랫동안 가장 낙후한 문화수준에 있었고, 경제적 기반마
저도 가장 허약하고, 견고한 정치적 단위도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서로마제국의 멸
망직후 한동안 이동 중에 있었던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국토에 여러 왕국을 세우
며 흥망을 거듭하던 시기에 이와 같은 문화적 낙후성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흔히 중세 전시기를 암흑시대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문명의 과도기적 혼란상에서 비
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로마의 유산과 게르만의 활력을 서서
히 융합하여 새로운 성격의 사회와 문화를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전환 과정에서
신·구의 요소를 융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기독교 교회였다. 교회는 중
세의 거의 전 기간 동안, 거의 유일한 지식집단으로서 문화의 보존과 사회통합을
위한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인간의 지적 호기심, 지식의 추구는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영화 속 호르
헤 수도원장이 그토록 금기시 하던 '웃음'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단어이다. 누가 웃지 말라고 한다 하여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독교적 사상에 의해 억눌려 오던 이성이 있었지만 그의 반대편에
서는 그 이성에 대한 자극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는 역사 속 많은
예를 통해 그 문화가 보존되지 못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를 보아
왔다. 그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문화 보존의 중요성인 것이
다. '溫故知新(온고지신)'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옛것을 익히고 그 위에 새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중세의 시대를 암흑시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
기 위한 준비의 기간, 즉 새것을 받아들이기 전 옛것을 보존하며 그것을 재해석하
여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한 기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이러한 기간이
없었다면 과연 과거 서양의 빛나는 문명이 지금까지도 그리 찬란히 빛날 수 있었을
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장미의 이름」이라는 이 책, 영화에
서 볼수는 없으나 어느 작품보다도 중세시대의 재현에 충실한 작품인 동시에 중세
의 수도원적 배경, 수도사들의 모습, 지식에의 갈망, 지식인들의 고민이 묻어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중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Stat rosa pristina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