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하나 하나를 넘기면서 공감, 의혹, 반감의 고개를 함께 넘어가는
독서체험을 했습니다.
우선 `예수는 없다`는 제목의 의미를 쫓아 읽었습니다.
과연 `예수는 없다`란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가 비기독교인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명제였습니다. 하지만 저자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책 내용에도 예수를 부정하는 글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올바른 예수의 믿음에 대해 역설(力說)고 있습니다.
어느 인터넷에서 받은 글을 보니 이 명제에 대해 `말과 말귀`에 관한 상위, 역설(逆說)의
개념으로 설명하더군요. 그 예로 불교의 화두(話頭)를 들 수 있습니다.
선방에서는 선사의 '아니다'를 '이다'로 그 말귀를 알아들을 때까지 가르친답니다.
그래서 화두 가운데는 "너가 길을 가다가 붓다를 만나면 그를 죽여 버려라"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으로의 회귀 메카니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볼 수 있습니다. 책의 제목도 `말과 말귀`의 역설의 맥락에서 본다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따라서 `예수는 없다`라는 말은 `있다`의 차원 높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의 `말귀`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그저 기독교인은 저자가 기독교에 흠집(?) 낸 것만을 되씹으며 분노하고, 비기독교인은
저자가 기독교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에 대해 쾌재의 웃음을 흘립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비록 저자가 책에서 기독교의 동정녀에 관한 다른 이해(희랍어 번역판에는 파르테노스
(parthenos)라고 하여 ‘처녀’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는
‘알마’(almah)였다. 알마는 개역판이나 표준새번역의 난외주에 나온 것처럼 그저 ‘젊은
여자`‘젊은 여인’이란 뜻이지 결혼도 안한 처녀라는 뜻이 아니었다. 마태복음 기자는
희랍어 번역에만 의존하여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으로 했다.)와 예수의 신성마저 부인하는
여러 예가 나옵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에 대한 경계 차원에서 말한 것
으로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을 저자의 본 그림의 배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의식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실존적인 삶과 직결
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시대에 따라 계속 의미 있는 것으로 재해석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의 전환`이라고 해서 굳이 상하가 뒤바뀔 만큼의 전환은 아니라고 봅니다.
각각의 개인차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누구나 기존의 기독교관에 대해 의식의 전환을
공감할 것입니다.
공허한 기독교 교리로만 남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에
적용 가능한 말씀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그러므로 저자의 기독교의 다원적 종교론을 떠나,
저자의 `의식의 전환`이란 측면에서 책을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