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음악 이야기' 나는 이 책을 읽기 위해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언니가 다니는 대학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달라고. 나의 부탁을 받은 언니는 내게 이것을 빌려다주었고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언니가 빌려왔을 때 나는 이것이 내가 처음보는 책이다고 그냥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본 적이 있었다.
그 땐 이 책을 읽어도 저자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기에, 아무생각없이 글자들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다시 읽고 나니,
왜 제목이 '나의 음악 이야기'인지, 저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만했다.
그런 이 책의 문을 여는 이야기는 '음악과 악보'였다.
(원래는 음악이야기라고 저자는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음악이라는 것과 악보라는 것에 대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시작은 지루하다. 이상하게 음악이야기에 전차에 탄 사람의 이야기를 하질 않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책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악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아쿠다카와 야스시는 악보라는 것을 다양성있게 표현했다.
콩나물대가리라고, 귀찮은 존재라고, 어쩌면 음악에서 떼어놓을 수 부분인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현재까지의 음악은 악보가 연주되어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야스시, 그가 작곡가여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보면서 나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고,
나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책은 음악의 일부를 교과서처럼 자세히 전달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것보다 더 깊은 감정과 느낌을 받게 해주었다,
나에게. 하지만 또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감정과 느낌을 준 부분의 이야기들은 전부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핵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한다. 예를들어 원자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중심에 핵이 있고 그를 둘러싼 전자가 있는데, 만약 그런 경우 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내 기준으로는)
그러나 야스시라는 사람은 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자에 먼저 눈길을 돌렸다.
그는 리듬이라는 원자에서도 역시 핵보다는 전자에 눈길을 주었다.
'리듬은 음악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리듬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알면 알수록 맞장구 칠만했다.)
우리의 하루 일과를 보면 잠에서 깨서 아침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냐는 인사와 잠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우리는 이것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다. 이 리듬을 깨고 싶다고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생각해보라. 한 회사원이 회사다니는 것이 짜증나고 지루해서 하루는 회사도 안 가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치자.
그러면 그의 생활리듬은 깨져서 변화해 버린 것일까? 지루하지 않게?
아니다. 생활리듬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의 90%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현재 사회도 그렇게 돌림노래를 부르고 있고 그것이 개개인에게도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리듬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도 발견되고, 리듬이란 것은 참 신비하고 다양한 존재다.
음악에서도 생활에서도 중요한 리듬이 선율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또 리듬과 선율이라는 것의 관계에 의해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이어져만 간다.)
선율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야스시의 생각을 알면 알수록 나는 흥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된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라는 부분에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또 하나 알아내었다.
이 곡은 일본의 자장가로서 불려지는 노래인데, 나도 어렸을 때 이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자랐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땐 할머니가 나를 많이 보살펴 주셨는데, 내가 잠잘 시간이면 항상 이 노래를 불러주셨다.
(일제치하의 생활 때 아마 이 노래가 우리나라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일본어도 하시고 이 노래도 아시는 거겠지.)
'우리 아기 착한아기 잠잘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니가 사다 주신 과자 한봉지, 먹어봐도 먹어봐도 배는 안 불러'
책에서 나와 있는 구절과는 다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위에 써놓은 것이 2절이라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하여간에 야스시도 이 노래를 듣고 자란 것 같은데, 같은 노래를 듣고 자랐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좋아해서 작가 말대로 모차르트나 브람스의 자장가보다는
이런 자장가를 아기에게 불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는 일본사람이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니 선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더 하고 싶어졌다. 바로 '이빨 빠진 할머니의 탄식가'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 이렇게 한 번 적어본다.
'벌써 신체의 자유를 잃어 버리고 옆으로 누운 채 요 위에서만 생활하는 팔십 몇 살의 할머니가
크게 기뻐하며 이빨도 없는 입을 벌리고 자기의 목청을 들려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말이나 가락이 허늘허늘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이 구절은 작가가 탄식가라는 해녀들이 부르던 노래를 파도소리와 함께 듣고 싶어
그 곡을 직접들어보려고 그 곡을 아는 사람을 찾는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다. 탄식가라는 곡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찾기 힘들었는데,
아는 사람은 이빨 빠진,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한 할머니였고....
그러나 나는 탄식가라는 것에 집착을 두기보다는 작가의 표현에 대단함을 느낀다.
"크게 기뻐하며...." 작가가 의도해서 이렇게 적어놓은 것인지 실제로 할머니가 그런 표정을 지으시며 행동하신 건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의 감정을 알 것만 같아서 왠지 가슴이 시렸다. 왠지모르게 가슴이 시렸는데, 아, 사람의 감정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가 제 1장, 2장, 3장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5장의 이야기가 더 남았지만,
나는 뒤의 2장의 이야기는 제외하고 나머지 3장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제 4장은 하모니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 5장은 형식, 제 6장은 악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모니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하모니는 조화라는 것이다.
굳이 화성학이나 그 외의 음악지식을 갖고있어야만 하모니를 이해하고 그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하모니라는 것 자체를 몰라도 그 달콤함은 느낄 수 있다. '키미가요'가 나오는 부분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부인들이 반상회에서 키미가요를 오르간에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부인들은 그것을 완전 4도로 화음을 맞추어 불렀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리듬에 맞춰 노래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화음을 알기는커녕 음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하모니를 만들 수 있었다. 정말, 이것보다 더 당혹스럽고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제 4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약간 딱딱해 보이는 부분이 바로 나온다. 소나타, 론도... 이런것들이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는 이 딱딱함을 감안하여 좀더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소나타와 론도형식이라는 것에 대해 남자와 여자의 기호를 사용하는가 하면 '질투하는 여자'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음악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악기이야기에 대해 잠시 글을 써보고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싶다.
악기이야기를 읽으며 정말로 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과 내가 얼마나 비슷한 가를.
(작곡을 하는 사람들이 비슷하긴 한가보다. 앞에 의사가 되려했다가 철학자가 되려했다가 작곡가가 된 사람이 잠깐 나오는데,
의사나 철학자 모두 내가 갖고 싶어하는 직업중에 하나다. 나도 그 두 개에 무척이나 많은 관심이 있다.)
악기이야기에서 야스시는 사람의 목소리와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관심을 주었다.
내가 만약 악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나도 야스시와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 둘 중에서도 바이올린을 이야기해본다.
역주가 따져본 바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완성된 것은 이순신장군이 난중일기를 쓰던 시대라고 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 그런 시기쯤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신기함을 느꼈다.
바이올린은 한 번 완성된 후에 현재까지도 악기자체에 대해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도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자체를 변형시키기 보다는 그 음색과 더 완벽(?)한 악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후에 나무를 직접 깍아 바이올린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가능할지?)
바이올린의 음색은 사람마다 다르다.
거친 파도가 내몰아치는 것처럼 그런 음색이 있는가 하면 날씨가 화창한 날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그런 음색을 내는 사람도 있다.
다른 악기보다는 감정이입되기 쉽고, (연주자가 바이올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음색이어서 빠져버리기 쉬운 악기.
바이올린을 킬 수 있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지만, 이런 바이올린을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연주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바이올린만 봐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음악가겠지.)
악기를 사랑해야 연주자도 그 연주를 듣는 청중도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보며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 항상 무언가가 남기 마련이지만 이번처럼 또 재밌는 경험은 처음이다.
처음 읽을 때는 '흠.. 별로...'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작가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그랬는데 다시 읽고 생각해보니.
아!! 탄식이 절로 난다. 역시 류노스케의 아들인가 싶었다.
류노스케의 거미줄이란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의 생각과 표현에 대한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유전인가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기 보다는 '아쿠다카와 야스시'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어 참 기쁘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쿠다카와 야스시. 그는 내가 태어나고 2년도 채 안되어 사망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생각을 읽고 탄식하고 느꼈다.
후에 내 생각을 읽고 탄식하여 줄 사람이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음악을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