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눈물과 위트, 세상살이의 따뜻함
미국 작가 O. 헨리는 러시아의 체홉, 프랑스의 모파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손꼽힌다. 그의 수많은 짧은 작품들은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면서 작가지망생들에겐 입문서의 구실을 해왔다. 도처에 넘치는 겨자씨를 씹는 듯한 눈물, 넘치는 위트, 읽는 이의 마음을 따스한 정서에 잠겨들게 하는 휴머니티, 특히 예측하지 못했던 돌연한 결말은 독서의 재미와 함께 인생의 의의를 드높이는 잠언적 감동을 수반한다.
그의 단편선집은 우리 나라에선 대개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마지막 잎새>라는 표제를 달고 출간된 바 있다. 이 작품이야말로 O. 헨리 문학의 성향이랄까 특질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그의 소설 대다수가 뉴욕을 무대로 한 것처럼 이 또한 가난한 미술가들이 지붕밑 방에 세 들어 사는 그리니치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생의 단면을 묘사한다. 잡지에 삽화를 그림으로써 생계를 꾸려 가는 두 처녀 슈와 조안나도 글들 중 일부이다.
그런데 11월이 되자 이 동네에 폐렴이 돌아 조안나가 병석에 눕게 된다. 그녀를 치료해 온 의사는, 환자가 자기 장례식 행렬의 마차 수나 헤아린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고, 그 대신 올 겨울 외투 소매의 유행에 관심을 기울일라치면 소생의 가망이 있다고 슈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하지만 조안나는 창밖 건너 벽돌집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며 남은 잎새를 헤아리는 데 넋이 빠져 있다. 그녀는 "담쟁이 넝쿨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때는 나는 가야 해." 라고 말한다.
같은 건물의 아래층에는 평생동안 화가를 꿈꾸며 살아왔으나 변변한 작품하나 그리지 못하고 60세를 넘긴 초라한 노인 베르만이 살고 있다. 그는 차라리 이 동네 젊은 예술가들의 모델 노릇으로 약간의 수입을 올리면서, 위층 두 처녀의 보호자 노릇에 위안을 찾고 있었다. 슈는 억지로 조안나를 잠들게 한다음 그런 사정을 베르만 노인에게 알려준다. 그 날밤은 늦겨울 비바람이 몹시 몰아쳤는데 이튿날 창밖을 내다본 환자는 그런 가운데서도 마지막 잎새 하나가 굳세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삶의 의지를 되찾게 된다. 억센 비바람이 몰아친 그 다음 밤을 지내고도 잎새는 끄덕도 없이 버팀을 보고는 조안나가 침상에서 일어나 먹을 것을 청한다. 그 시간에, 전날 아침 급성 폐렴으로 병원에 실려간 베르만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슈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베르만 노인은 그날 밤으로 벽돌집 담벼락에 사다리를 걸고는 등불을 켜들고 필생의 단 한편인 걸작, 즉 마지막 잎새를 그려놓고는 비바람에 젖어 언 몸을 침대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명화들이 남겨졌지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위력을 가진 그림이 있었던가? 또 우리는 "이웃에의 사랑"을 귀따갑게 들어왔지만 정녕 자신의 목숨을 던져 꽃다운 젊은 생명을 구한 고귀한 사랑을 접할 수 있었던가? <마지막 잎새>는 그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값진 눈물과 인간애에 상도케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 밖에도 이에 필적할 만한 뛰어난 작품이 수다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가난한 신혼부부가 성탄절을 앞두고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선물을 사야 할 일로 고심을 한다. 궁리 끝에 남편은 자신의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빗기에 합당한 머리 빗을 샀고, 그 아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으로 시계는 훌륭하나 시계줄이 낡아빠진 남편에게 백금 시계줄을 선물로 샀다. 이를 교환하는 성탄절 전야의 한 부부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낙담화 회한은 간 곳이 없고 오직 치솟는 애정과 저미는 행복이 에워쌈을 보리라. 동방박사의 선물은 20세기에 이르러 이처럼 도시의 가난한 지에서 다른 모습으로 재현된다.
<경관과 찬송가>는 겨울에 유숙처가 없는 실직한 사나이가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번 불법을 행하나 경관은 그때마다 무심히 보아 넘긴다. 드디어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찬송가를 듣고 마음을 다잡은 사나이가 생의 의욕을 획득한 찰나, 무위도식 행려자로 몰려 경범재판소에 끌려간 끝에 금고 3개월에 처해진다. 모순 덩어리의 세상을 조롱함에도 그 속에는 유머와 세상살이의 때가 묻은 어떤 정감이 흐른다.
<20년 후>를 비롯해서 O. 헨리의 작가적 체질을 떠올리게 하는 보석 같은 명편들이, 그 어떤 단편집에도 수록되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짧은 이야기들 속에 인생에 대한 오묘한 경구, 더불어 살아감의 도리와 편안함, 그리고 미국적인, 그야말로 미국 소시민의 평범한 정의감과 인정의 기미들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학생시절에는 한 두편의 O. 헨리 작품을 대했을 것임에도, 정작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시점에서 가까이 대함으로써 더욱 덕목을 높일 수 있는 그의 걸작들을 왜 독자들이 멀리하는지, 불가해 할 따름이다. 우리의 삶에, 또 긴 생의 여정에서 이만큼 정신적 청량감을 주는 작품집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과 함께 가장 널리 애독되는 <20년 후>는 아주 짧아 콩트에 속할 만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20년 전, 뉴욕에 두사람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한 청년은 스무 살의 지미 웰즈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열 여덟 살의 보브였다. 그때 서부에 일확천금할 수 있는 경기가 일어 모험심이 강한 보브는 웰즈에게 같이 서부로 가서 돈을 벌어보자고 권했지만 웰즈는 뉴욕이 좋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헤어지게 되었지만, 20년이 지나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서로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 또 아무리 멀리에 있더라도 마지막 음식을 나누었던 그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나기로 굳게 약속을 했다. 과연 서부로 떠난 보브는 그 약속을 지켜 천 마일을 머다 않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레스토랑은 철물점으로 바뀌어져 있어 그 길가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같은 시간에 한 경관이 평소의 습관대로 의젓하게 걸어오다가 그 사내를 보고는 말을 걸게 되었다. 물고 있던 시가에 불을 붙일 때 보브의 눈썹 가까이엔 상처가 있었으며, 넥타이 핀에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경관은 보브로부터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우정에 대한 얘기를 듣곤 감동을 받은 듯 찬사를 보내고 떠나갔다. 약 20분쯤 경과해서 지미 웰즈가 나타났다. 서로 반갑게 만나 간단한 안부 말을 나누고는 팔을 낀 채 밝은 길모퉁이로 나왔다. 불빛 아래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보브는 대경실색한다. "넌 지미 웰즈가 아니야. 그래 20년이 아무리 긴 세월이더라도 사람의 코를 로마형의 코로부터 사자 코로 바꿔놓을 수가 있단 말이야?"
그때서야 친구를 자칭했던 그 사람은 보브를 향해 당신은 10분전에 체포된 몸이라며, 지미 웰즈가 급히 쓴 종이쪽지를 전한다. 이 짧은 소설은 다음의 문면으로 얘기가 끝난다.
"보브, 나는 약속 시간을 맞춰 약속한 장소로 갔네. 자네가 시가에 불을 붙이려고 성냥을 그었을 때, 나는 자네가 시카고에서 수배중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러나 어쩐지 내 손으로 자네를 체포할 수는 없어, 되돌아가 동료 형사에게 부탁하여 이 일을 완수해 달라고 한 것이네."
요컨대, 의리가 있었던 보브는 신사강도로 수배중인 인물이었고, 고집스럽게 뉴욕에 안주했던 지미 웰즈는 경관이 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웰즈가 친구와의 재회를 한층 극적으로 만들고자 시치미를 떼고 접근했던 심리 추이와, 경관이 친구인 줄도 모르고 속사정을 털어놓은 보브의 들뜬 정황이 교묘하게 짜여져서 일견 대수롭잖아 보이는 얘기에 정채를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 의리보다도 사회적 정의를 우선하는 미국인의 공복(公僕) 정신, 혹은 민주시민의 자질을 구현하고 있는 주체의식이다. 오늘날 미국이 번영한 저간에는 악을 응징하고 공공질서를 지켜 나가려는 관리의 도덕적 덕목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천 마일을 달려 찾아온 친구를 자기 손으로 체포하지 않는 국면 전환의 묘에서 메마르지 않는 인정세계도 일별된다.
O. 헨리는 이런 점에서 우수한 단편작가 이상의 모럴리스트요, 재담가를 뛰어넘는 차원의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다. 게다가 10년간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에서 3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도 그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이 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