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자료제공- http://www.kebi.com/~aceza/frame1.htm()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이휘소......"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질문을 입력받은 뇌수의 흐름에 따라 도착한 곳에는 이휘소라는 이름 석자가 있었다. 사실 이 질문 속에 내포된 작가의 의도를 아직까지는, 문학 작품 이해 수준이 바닥에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어 펌프로 지하수 뽑아 내듯 단숨에 뽑아 올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말을 마치 예쁜 인형을 보면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그 인형을 품에 꼭 껴안고 놓지 않고 싶어하듯 또는 낙지나 문어 등 흡반을 가진 생물들이 목표물을 발견하면 흡반으로 목표물을 빨아 당기면서 그 목표물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내 품에 꼭 껴안고 놓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고 내 흡반을 이용해서 놓치지 않고 싶다. 그리고는 일상에 지칠 때마다 한 번씩 품에 꼭 안고는 흡반으로 잃지 않으려 했던걸 힘을 꽉 주었던 팔과 흡반에 힘을 풀고는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는 꼭 천재가 아니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박제가 되지 않기 위해 나를 되돌아보고 싶다.
혹시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서 아는가? 아니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가? 아마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더러운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인물이니.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진실한 역사가 파헤쳐지면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 이름이 있는 곳에는 김재규 정보부장이 늘 따라다니듯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는 호칭으로 존함이 불릴 자리에 서실 분이시다.
이휘소 박사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국인으로써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이셨으나 아니 노벨상을 받을 확률이 100%라 해도 과언이 아니셨던 인물이셨으나 (사실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어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대세에 따라 사인을 추측한 걸 바탕으로 하여)조국을 위해 장렬하지만 겉으로는 조용히 성조기(정말 안타까운 부분이다)를 덮고 죽음을 당하신 분이시다.
"이상"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심장 박동은 있지만 한없는, 정도를 벗어난, 권태로움에 빠져버린 인간에 비유했다. 하지만 작가가 설정해 둔 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좀 더 뇌수의 흐름을 따라가 보니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으로써 박제가 되어 버린 한 천재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휘소 박사님은 너무나 아까운 분이셨다. 오죽 했으면 이휘소 박사님의 지식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의 뇌 이식 수술까지 상상했으니 어느 정도인지는 가히 짐작 가능하다. 만약 이휘소 박사님께서 지금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지금 우리 나라의 사정도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에는 중국, 이제는 문화적으로는 일본이나 미국, 정치·군사·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미국에 굽실거리는 그런 추한 모습을 한 국가가 아닌 하나의 핵무기 보유국으로 어엿하게 성장해 우리의 잠시 근대화에 주춤한 역사적 오류로 문화의 발달이 10년 정도 우리보다 앞선 일본을 이기고 일본과는 서로 견줄 수도 없을 만큼 강한 강대국으로 아시아의 거목으로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나는 시선을 흰 바탕에 검은 점들이 빼곡이 들어 찬 종이에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이 끓어올랐다. 이휘소 박사님께서 [날개]의 주인공처럼 겉으로는(글쎄......) 마치 우울증에 걸린 환자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셨더라면(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휘소 박사님의 능력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랬더라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공식적으로 조사가 되지 않았기에 어디까지나 대세에 따라가는 추측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미국의 교묘한 공작에 휘말리시어 죽음을 당하시고 아울러 우리 조국의 미래가 밝아질 가능성을 위축시키지도 않았을 테고 대한 민국의 운명도 뒤바뀌었을 것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역사를 하나 둘씩 머리 속의 방 한 칸 한 칸에 채워가면서 비운을 느끼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심정이랄까? *^.^*).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뱉어진 말이다. 나라를 위해 훌륭히 돌아가신 한 아까운 인재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보다 더 뛰어난 인재가 많이 우리 나라 한국에서 배출되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당신은 어느 소설가를 가장 존경하지요?"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김해경], 즉- [이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은 있어도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대한 작품에서 그 소설가를 존경해본 적은 실로 내게는 처음이다. 작품을 대하고 작품의 우수성에 대해 칭찬의 박수를 보내본 적은 있어도 작품과 작가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본 적은 처음이다. 그만큼 [날개]라는 작품의 우수성과 함께 김해경 작가의 글쓰는 능력에 놀라움을 느끼고 본받아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된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항상 교과서에 똑같은 비유문만 나올 때마다 무리한 답답함을 느꼈던 탓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날개]라는 작품에서 정말 놀라우리만치 참신한 비유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이 김해경 작가를 무조건 존경이라는 이름으로 대하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앞으로 김해경 작가의 작품을 많이 대하고 비유들도 많이 배우면서 본받고 나의 글 쓰는 능력을 한없이 키워 나가고 싶다.
김해경 작가의 표현 중에서 의아한 것이 있어 키보드 키를 조합해 본다. 굿바이. 이상하리만치 [날개]라는 작품 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이 말이 등장한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라는 말이 문학 작품 이해 수준이 바닥에서 끝도 보이지 않는 머리 위를 목 아프게 올려다보는 단계에 밖에 미치지 못한 탓에 곳곳에서 반사되어 독자의 동공에 비치는 이 굿바이라는 낱말이 어떤 의미이고 이 속에 숨어서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무식한 발상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늘 시험 날엔 답을 잘 모르겠으면 문제를 다시 한 번 보아라, 문제 속에 답이 있다라고 내게 끝도 없이 주입시키시려는 엄마의 말씀처럼 아무리 이 부분을 읽어도 굿바이라는 말의 용도는 물론이거니와 뜻조차도 알 수 없다. 도대체 어디까지 산 자락을 타야 문학을 정복할 수 있는 고지가 보이는지를 지금의 내 위치에서 생각해보니 답답함에 가슴이 꽉 막혀올 따름이다.
흰 바탕 위의 점들의 빼곡한 집합의 마지막을 지나고 나서 되돌아본다. 사실 약간 얼굴이 붉어오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자의식 문학을 접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그 동안 자의식 문학이라는 게 문학의 갈래 중의 한 가지라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그런데 이런 무식한 내게 운 좋게도 처음부터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작가의 자의식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성큼 다가왔다. 신선한 충격! 그 말의 뜻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자의식 문학이라는 게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단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내세운 문학들과는 차별화된...... 앞으로 자의식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여지가 좀 더 많아졌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나]는 주위의 사람들과 접촉하려 들지 않는다. 오직 아내와만 접촉하려 든다. 이 대목을 보니 현대 사회에서의 이웃들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서 손 맞잡고 강강술래하듯 빙빙 맴돌았다. [이웃사촌],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더 낫다] 등등의 이웃과의 높은 수치를 기록한 친밀도를 표현한 말이 나올 정도의 전통 사회와는 달리 오히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웃과의 교류가 줄어든, 아니 어쩌면 억지로 막아버리려는 현대 사회의 이웃들. 점점 더 서양의 차갑고 직선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사회를 더욱 더 삭막하게 만든다. 나만 해도 그렇다. 우리 집이 있는 층 외에는 올라가 본 적이 없다. 똑같은 하늘이지만 내 조국의 하늘과 외국의 하늘과는 다르듯 우리 집이 있는 층과 위층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굳이 노력해서 그 분위기를 느껴보려 애쓰지 않았다. 이웃들과 반가이 인사하는 일도 없었다. 굳이 핑계를 내세우자면 사람들의 얼굴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왜 지금껏 모르고 처연히 아니 그 처연함조차 느끼지 못한 채 있었을까? 내일은 엄마께 부탁드려서 전이라도 부쳐서 들고 위층의 분위기를 느끼러 가보아야겠다. 우리 조상들의 따뜻한 이웃과의 교류 모습처럼 우리 사회도 따뜻해지고 밝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한 번 외쳐만 아니 속삭여만 주어도 듣는 이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이다. 좀 더 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이 작품을 대하고 희망을 얻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아니 어쩌면 나의 정도라는 테두리를 너무도 벗어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날개]라는 작품은 높은 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아니고서야 일반 서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천릿길을 걸어가는 것과 비길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해서 국어 시간을 통해 학교에서 어느 정도 학습하고도 거의 바닥을 기는 막대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나의 문학적 소양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보다도 너 낮은 문학적 소양을 갖춘 서민들이 이 [날개]라는 작품을 하나의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수련을 거쳐야 할 것이다. 좀 더 쉽게 쓰여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읽히고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손 뻗어 희망의 꽃을 한 송이나마 건네줄 수 있었더라면 이 어려운 시국에 사람들의 약해져 가는 정신만은 다질 수 있었을 텐데...... 여운이라는 긴 꼬리표를 달고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날개]라는 작품을 하나의 고귀한 문학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접한다면 그 사람들의 겨드랑이가 불현듯 가렵기를 바란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힘차게 날아 오를 수 있는 더 나아가 성공하고 밝은 미래를 맞이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저력을 가진 날개가 돋아 나오기를 빈다.
흰 바탕의 까만 점들의 하나 하나의 집합들에 하나하나 눈의 검은자위를 돌리다보니 이 주인공 [나]에서 본받을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나친 권태로움에 자신을 빠뜨리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주인공의 성격에 따끔한 충고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던 심정이었을 만큼 주인공 [나]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 본받을 점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불현듯 사람들은 각자 한 가지씩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초등학교 시절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둥실 떠올랐다. 주인공은 참 생각을 많이 한다. 이것저것 어떤 것이든 심지어 연구를 한다라고 표현할 만큼 생각을 많이 하는 인물이다.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영상 매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만 믿으려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않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점점 사람들은 생각의 수도꼭지를 잠가가기 시작했다. 이제 애처롭기까지 하게 생각의 물방울의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시간 사이의 공백은 너무 크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희망인 것은 아직 완전히 잠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진다. 자, 예전에는 서서히 잠가 갔으니 이제 수도꼭지를 천천히 열 때이다. 주인공 [나]를 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소심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속은 꽉 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이다. 작품 속에서 보듯이 박제도 다시 살아났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박제가 되어 버린 우리의 머리를 돌릴 힘이 없단 말인가! 자, 이제 천천히 열자. 너무 서두르려 하지 말고 서서히......
마지막 대목에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를 보는 듯 하다. 노사관계처럼 불안정한 관계가 없다. 평소 때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있다가 언제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또 그에 대해서 불만을 토해내며 파업을 일으키고 대립할지 모르는 그런 불안정한 관계이다. 하지만 비록 작품 속에서는 변해할 필요도 없고,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라고 일단락 지었지만 주인공 [나]가 마지막에 그 판단이 어리석었음을 깨닫듯이 우리 현실에서는 서로 타협하면서 더 이상 불안정한 관계가 아닌 편안한 관계로 남아 있길 바란다.
요컨대, 다시금 대한 민국에서 이휘소 박사님 같이 훌륭히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해 주실 애국심과 능력을 가진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대한 민국의 무궁한 발전 아래 있길 바라고, 그리고 자의식 문학이 좀 더 보편화되어 더 많은 발전을 이룩하기를 바라고, 또 한가지 이 어려운 시국에 다시금 대한인의 저력을 발휘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길 바라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아울러 바라며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소멸되길 바라는 것들을 되뇌며 이 글을 마친다. 박제가 되어 버리는 인간, 숙명적인 절름발이......
※ 이휘소 박사님의 사인과 더불어 박정희 대통령과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은 단지 그 당시의 소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님의 사망 후의 미국의 태도와 여러 가지를 조합해 볼 때 제 글에서의 이휘소 박사님에 대한 사실을 진실일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입장에서 위 글을 써 내려간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