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시인(詩人)
시인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김삿갓이라고 널리 알려진 방랑시인
이었던 김병연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시인이 되어 가는가를 이문열 작가가
나름대로 정리해서 내어놓은 글이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눈에 들어온 시인의 세계를
접하고 그의 추구하는 이상을 볼 수 있는 좋은 글로 받아들여진다.
어쩌면 김병연이라는 시인을 통하여 이문열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란 무엇인가 사물이나 사건을 통하여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인이란 적어도 자신의 내면을 살필 줄 알고 내면의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자연현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이 그
대로 나타남을 보게 될 것이며 자연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병연이라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시를 쓰지만 나중에는 자연과 하나되며 조화되는 진정한
시인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시인이라고 칭하지는 않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는 김병연이라는 한 사람이 시인이 되어 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1기는 본격적인 방랑이 시작되던 스물 여섯부터 다복 동을 찾아간 서른
서넛까지의 기간이다. 형식상으로는 공고한 과체시를 바탕으로 하며 내용상
으로는 자기 성취를 위한 내면의 정서가 주조를 이룬다.
표현방식은 화려하고 풍부한 수식과 과장된 감정표현을 하며 시의 소비대상은
주로 지방의 상류층이라는 사람들과 기생들이다.
제2기는 김병연이 다복동을 찾아 원명대를 만난 때로부터 관서지방을 떠돌던
5년간의 기간으로 볼 수 있으며 민중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시기이다.
형식상으로는 파격적이며 내용상으로는 기존 체제 유지자들에 대한 야유와 비판이
주류를 이루며 시의 소비자는 다수의 서민계층이다.
제3기는 노진의 야유 때문에 관서지방을 떠나면서부터 관조와 자기 관찰의
정서를 주제로 한다. 제1단계에서 보이는 과장된 감정이나 표현도 없어지고
제2단계에서 보였던 기존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악의도 없어진다. 오히려 이런
인간 세상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이해하는 쪽으로 가며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것이 주제가 된다.
제4기는 지천명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취옹과 다시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때부터는
문자로 정착되지 않는 시를 말하는 단계이며 결국 그 몸이 시가 되어 시인과 시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 단계로서 진정한 시인을 말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의 의미란 정적인 머무름에 있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흐름이며 그 흐름 가운데 부딪치는 난관들이 어떻게 극복되어지는 가를 그리면서
한 시인이 시인으로 나타나기까지 나아가는 눈물겨운 삶의 모습을 그리고있다.
관념이란 삶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관념적이란 말은 죽은 인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있다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삶은 그대로이며 에고를 버림이 아니라 에고를 붙잡음이다.
성경에 보면 관념적인 상태를 차지도 덮지도 아니한 상태로 표현했는데 모든 것이
관념 속에만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살았다고 생각하고 부하다고 생각하고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앎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만큼이며 자아를 버린 만큼인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
병연이 금강산의 취옹을 처음 만났을 때 시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시란 무엇이며 시인은 무엇을 위하여 시를 쓰며 그리고 시인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밤을 세우며 대화를 나눈다. 시가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는
세상에서 시 그 자체가 유일한 목적이어야 진정한 시인이라는 취옹의 말은
글을 쓰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시는 벌써 시인으로서
가야할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이란 시로서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고 돈을 얻는 것도 아니며 다만 시를
얻을 뿐이라고 한다. 목적이 수단을 배신하거나 수단이 목적을 배신하는 것은
세상에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수단과 목적이 하나이며 어느 쪽도
이용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곧 시이며 시는 곧 시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거나 시를 쓰기 위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와 시인이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관계이다.
작가는 시인에서 혈연관계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인 김병연이 주어진 환경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버리고 떠나야하는 삶의 배경을
그리고 있다. 김 병연이 왜 떠나야 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반역자의
손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반역자의 손자이기에 출세의 길이 막힌다면 할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해야 하는가! 운명으로 단순히 받아넘기면 되지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작가는 이 문제를 단순한 이해나 운명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병연이 좌절과 일탈을
통하여 진정한 시인의 길을 감으로서 화해의 길과 이해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개인의 문제는 결코 조상의 탓으로 끝나는 운명이 아니라 바로 이 사건을 통하여
자기를 발견하고 정립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또 작가는 사회운동이나 사회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을 정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대의와 명분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병연은 원명대를 만남으로 시인으로서의 제 2기를 열게 되는데, 이 때 병연이
감동한 것은 소위 "평등이라는 깃발 아래 기성의 체제를 변혁하려는 운동"의 대의와
명분이었다. 그러나 병연은 묘향산에서 늙은 선비를 만나 그 대의와 명분의 허구를
접한다. 체제에 대항하여 싸우는 반체제 역시 또 다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같은 것임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체제의 악을 고발하며 선이라는 깃발을 들면 체제에 탈락된 자들이 모여들게
되며 또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다음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들이 집권하면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까마득히 생각하는 것이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병연의 아들 익균을 통해서 보여진 시인 병연의 모습이다.
익균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가 알게된 것은 완성된 시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시인의 모습이었다,
시인이 있으면 시가 있고 시가 있는 곳에는 시인이 있다.
시인이 죽으면 시도 없고 시가 없으면 시인이 없는 것 죽은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그래서 시와 시인은 함께 하며 영원한 것이다.
시인이 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시는 문자가 아니다.
거기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한송이가 바로 시이다.
그러므로 시는 살아있는 실체인 것이다.
시와 시인은 영원히 하나이며 생명 그 자체이지
표현된 어떤 것이 아님을 작가는 마무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영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영생이 없다.
시와 시인이 하나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은 하나이며
영원히 존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