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무는 무척이나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가지 뿌리 열매 잎사귀... 세상을 온통 푸르게 물들일 만큼 예쁜 이름을 가진 나무가 나는 부럽기 그지 없다.
2.
요즘 바람이 많이 분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이 주말이면 비가 내려 촉촉하게 흙내음을 풍기곤 한다. 토요일이면 시내에세 집까지 홀딱 비맞고 뛰는 일이 잦아졌다 - 우리 집은 언덕 주택가에 있다. 비교적 조용한 동네다 - 뛸때 내리디디는 그 질퍽한 땅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비오는 날이 싫다. 다 젖은 양말이며 칙칙한 냄새며, 축쳐진 머리, 비온뒤 창문 닦기, 온갖 것들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오후다.
비오는 날이 몽땅 싫은 것만은 아니다. 따끈따끈한 방바닥이나 호호 불어가며 먹는 비오는 날의 김치부침개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나뭇잎 위로 덜어지는 후두둑후두둑 빗소리. 그 기분 좋은 빗소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우리집 커다란 창 밖으로는 나무들이 어기성기 심어져 있다. 후박나무,철쭉, 복숭아 나무, 어린 사과나무, 목련, 사철나무, 백향목... 어쨌든 나뭇잎 위로 떨어진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호두둑 하고 세상을 맑고 톡 씻어줄 것만 같다. 그 소리를 만드는 나무가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어쩌면 그리도 시원하고 싱그러운지.
내 귀에만 그렇게 싱그럽게 들리는 것인지 모두에게 그렇게 들리는 것인지.
그 싱그러운 소리가 들릴때마다 나는 항상 어릴 적을 떠올리곤 한다. 아직은 철없고 어리석고 작고 꿈만 컸던 그때를.
훌쩍훌쩍. 다들 나만 미워하는 것 같아 서러워 자주 울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뿐아니라 ㅁ낳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이 있을거다. 그냥 여유로울때 가만히 앉아서 회상하며 피식 웃어볼만한 그런 어릴적 작은 경험담이 다들 있을 거다. 종종 여행을 갔을때나 친구들과 밤을 새우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웃으면서 떠들만한 그런 이야기들이 있을거다. 나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엄마한테 호되게 혼나 속상해서는 마당으로 나와 쭈그리고 앉아 고집스럽게도 울음을 참아보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꾹 깨물고는 궁상을 떨던 얼마 안된 어린시절. 그때는 엄마가 내게 걸었던 기대들과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를 이해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던것 같다. 왜 그거 밖에 못해. 엄마가 하지 말랬지! 말 안들을래? 엄마의 호통에 눈시울이 붉어져 마당으로 나온 나는 감나무 아래서 쭈그리고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훌쩍훌쩍. 엄마는 나만 미워해. 바람이 부는 날이던, 눈이 내리던, 비가 오던, 나는 항상 나무 아래서 입술을 꼭 깨물면서 자랐던 것 같다.
그 많은 어린시절 중에 내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날이 있다면 비오는 날이리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우상을 쓰고 들었던 그 시원하고 싱그러운 빗소리. 감나무 잎사귀에 덜어지는 그 빗소리에 맞춰 나느 노래를 부르곤했다. 엄마는 음치인것도 닮냐하시면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셨다. 그다지 피아노를 잘 치거나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것은 아니지만 음정 박자는 맞출 정도는 된다. 아무튼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좋았다. 누구 앞에서 부르라면 쑥스러워 하던 나였건만 혼자서 부르면 잘도 부른다. 어찌 되었건 나무 아래서 빗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그때 볼에 눈물콧물이 뒤범벅된 채로 환하게 웃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게다. 그렇게 마당 구석에서 나무에게 칭얼거리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무는 나의 라임 오랜지 나무에 나오는 밍기뉴 마냥 소중한 친구였다. 속상할때만 나무앞에 쭈그리고 앉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상을 탔을때도, 달리기에서 1등했을때도 나는 나무앞에서 베실베실 웃으며 혼자 축하하던 기억이 있다. 그러기에 나무는 내게 더없이 큰 의미와 귀여운 추억을 가진 존재다.
요즘은 나무라는 그 소중한 내 친구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주위에 나무는 흔하디 흔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칭얼거리던 그 착한 친구 나무의 이름은 단 하나의 소중한 이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뭇잎새에 덜어지던 빗소리는 나무가 내게 해주던 위로가 아니엇을까. 창밖으로 빗줄기가 시원하게 흐른다. 지금은 늙어서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감나무는 비가 오는 날이면 싱그럽게 물을 머금고 나의 얼니시절을 회상한다. 나의 소중한 친구. 나무에게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나무라는 이름은 오래전 내가 간직해오던 주문이다. 주문을 걸자. 나무야. 나무야. 나무. 비 갠 뒤 하늘은 너무도 맑을 것 만 같다.
3.
봄이면 물이 오른 나무들의 가지에서는 새록새록 잎새가 파란하늘에 연두빛 그림을 그린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가지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면 금새 상쾌해 지곤한다. 세계 인구중 1/3은 그 상쾌함을 잊어가고 있고 또 1/3은 그 생쾌함을 모르며 1/3은 그 상쾌함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중 어느 사람인가. 난 참 다복한 사람이다. 잊지도, 모르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어릴적 부터 살던 우리집 마당에는 그 상쾌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는 여유롭게 나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무의 소리를 잃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오래전 우리가 나누던 사랑, 효, 우정...
우리는 나무를 닮아야하고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나무는 인간 보다 수천배 더 바쁘며 수만 배 더 위대한 일을 하므로. 우리는 나무가 주는 산소로 숨 쉬고 나무가 주는 열매를 먹으며 나무가 주는 그늘에서 쉰다.
나무의 소리는 우리가 숨쉬는 소리요 우리의 삶의 소리다... 우리는 살아있다.
4.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금 가까이에서 자라는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이어져 하나가 되곤한다. 이를 연리지(連理枝)라 한다. 연리지는 긴 역사와 함께 사랑과 효와 우정의 상징이 되어왔다.
요즘 우리가 잃어가는 행복한 그 모든 것을 연리지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둘보다 하나, 우리의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들.
연리지의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처럼 우리도 서로 사아하면 안될까. 어려운 수학문제도, 산더미처럼 쌓인 일도, 모든 것들은 쉽게 질리지만 우리가 어릴적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은 질리지 않을 거다.
연리지가 내게 준 소중한 선물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어느 새인가 내가 부적 자라낫다. 모든 것을 쉽게만 생각하는 오늘, 나무는 편하고 조용하던 날들을 꿈꿔 본다.
새벽. 모든 것이 잠든 시간. 나무는 숨을 쉰다. 아침을 준비한다. 나무는 무척이나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이름이 부럽기 그지 없다.
-서기 2002년 4월 지금은 따뜻해 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