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학과 문인질서
중수필 / 주현중
전 세계를 통 털어 문학인에 있어 등단제도가 있는 나라는 일본과 대한민국이 전부라는 것은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창작하는 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등단제도가 타당성도 있을 것이고 불합리한 제도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만 해도 2005년 현재 기준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각종 문인단체(문예지)가 300여종을 넘어서고 있다. 물론 방대한 숫자의 문인단체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다양성과 신인문인 배출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보아도 좋다. 정식으로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문인협회(출판사)도 있고 활동을 하며 시인을 배출하면서도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문예지도 300여종 중에 200여종에 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문인단체와 문예지가 등록이 되고 안 되고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 가지 문제점 중 그 첫 번째로 각종의 문인단체와 각종 문학상으로 인해 문인의 수만 부풀리는 현상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문인이라면 문인단체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모 월간 문예지에서 30명이라는 신인작가를 등단시켰다는 이해할 수 없는 작태를 지적하는 바이다. 신인작가의 응모작이 향후 발전가능성이 높고 우수하다면 30명이 아니라 100명을 등단시킨다 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문제는 작품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체의 운영이 어려운 현실을 명분 삼아 신인응모작이 당선되면 등단비, 입회비, 회비에다 등단자의 기본이라며 등단작품이 실린 문예지를 일률적으로 부수를 정해 놓고 구매를 강권하는 불합리한 처사야 말로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많고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적다는 현실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고 할 것이나 그렇다고 하여 등단부터 시키고 보자는 어설픈 잣대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일부 아주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등단작가들에게 금전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는 일급수에 해당하는 모 문인단체 문예지도 있다는 점도 밝혀두고자 한다.
두 번째로 출판사의 운영과 단체의 제정문제를 해결하고 조기폐간을 막기 위하여 타 단체보다 단체회원의 수적 우위를 다지자는 것에는 공감을 할 수 있겠으나 타 단체에서 등단한 작가를 속된 말로 빼가고 빼오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예비 작가들이 문학의 열정으로 창작에 창작을 거듭하여 스스로 문인단체의 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기성작가들의 소위 말하는 작품성이 좋으니 등단을 해보라는 식으로 끌어들이기의 단체의 선전술도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비 작가들 중에도 우수한 창작을 하면서도 등단을 하지 않고 재야에 묻혀 있는 알자백이 문학도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자. 필자도 기성문인이라는 대우를 받는 한 사람으로서 알자백이 문학도들 앞에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것은 재야에 묻힌 알자백이 문학도의 글이 필자보다 더 우수하다는 판단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로 뜨거운 열정으로 창작에 창작을 거듭하는 예비 작가들에게 우선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여기서 짚어 볼 문제는 과연 본인이 왜 문학을 사랑하고 창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가를 스스로 골똘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저 문학이 좋아 여가를 활용하여 취미로 글을 쓴다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나 등단을 하여 “나”라는 존재를 기성문인이라는 미명으로 유명세를 얻어 보겠다고 한다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릴 일이다. 영화배우나 탤런트나 개그맨은 사전에 짜여진 대본이 필요하지만 글을 쓰는 문인은 대본이 필요치 않다는 점을 지적해 두며 문인이라는 미명으로 부를 축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예전이나 현재나 글을 쓰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이 없는 한 부자라고 불리는 문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문인의 운명과 같은 멍에이며 나아가 문인의 정서는 티 없이 맑고 맑아야 추앙받는 문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문인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작가라는 직업 하나만으로 의식주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작가라는 직업 외에 제2의 직업이 있어야 글지이는 가난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바꿀 수 있다]라는 도이 김재권 시인의 말을 소개해 둔다.
네 번째로 물론 작가는 문학을 전공하여야만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바뀌었다는 것은 좋은 발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글지이는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자 한다. 문학을 전공한자만이 글을 쓴다고 한다면 이 지구상의 작가는 모두가 대학 교수이고 총장, 학장일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 역시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작가라는 점을 지면을 통해 밝혀두며 다만, 과거에는 은유법으로 함축을 시킨 운문시(韻文詩)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하겠다. 시란 함축적일 때 감상하는데 있어 감칠맛이 난다고 필자는 본다. 그러나 현 신세대 신인작가들이나 독자들은 이해부족으로 인해 함축적인 시를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그저 단순하게 심상으로 쉽게 파고들며 감상미도 즐거운 산문시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물론 산문시도 전혀 함축되지 않고는 시적 맛이 없는 것이지만 가장 감상하기 편하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의 귀결이겠지만 수학개념이 들어가는 [+, -, =, 3⅓] 등등의 신기하고도 독자들로 하여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시어들이 탄생된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며 과연 독자들이 이러한 시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를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바이다.
끝으로 필자가 어필하고자 하는 것은 함축적인 운문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기본의 틀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이며 2003년까지만 해도 신인등단작품으로 산문시가 주를 이루었으나 2004년 후반기부터는 운문시가 50%, 산문시가 50%로 절반씩 등단작품으로 선정되어 간다고 한다. 흔히 우리의 시는 1연 4행 3연 또는 1연 4행 4연의 형식으로 쓰여 내려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왜 대한민국과 일본만이 등단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하고 마치 일기에 진배없는 산문일기 형식의 시만 쓴다면 시인 아닌 사람이 없으며 수필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며 소설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 가지 꼭 꼬집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민족은 생각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이다.
눈으로 읽혀 쉬이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에 와 닫는다면 오죽 좋은 일이겠으나 동서고금을 통 털어 유명작가의 글을 보더라도 쉽다고 할만한 글은 단 한편도, 단 한권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심사위원에게 미움을 받아 노벨문학상에서 밀려난 톨스토이의 문학을 과연 이해하는 자 몇이나 되겠는가? 시를 감상하던 수필을 읽던 소설을 읽던 생각을 하면서 감상을 하자고 호소하는 바이다. 필자는 왜 이렇게 썼을까? 나라면 이렇게 쓸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라는 생각의 나래 상상의 나래를 펴고 한편의 시를, 한권의 책을 읽어주기를 소망한다. 숫돌에 갈지 않은 녹슨 낫은 고물장수가 집어간다는 삶의 이치를 깨닫자. 그리고 신인작가로 등단을 했다면 강권이 아닌 자율권으로 단 몇 권이라도 자신의 등단작품이 실린 문예지는 구매를 하여야 문인의 자질이 인정되는 것이 아닐까 묻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