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앨범
나에게는 오래된 친구와 새로운 친구가 있다. 내가 말하는 오래된 친구와 새로운 친
구란 그 친구를 언제부터 사겼나에 따라서 달라진다.오래된 친구, 그친구의 이름은 민
진이다. 민진이와의 만남은 아마 6년전 부터일 것이다. 내가 김해라는 곳에 이사를 간
때 부터이니 1학년때부터 쭈욱 같이 지내왔다고 할수 있다.
잔디로 뒤덮인 경사진 언덕에서 쌀 포대를 타고 신나게 내려가고, 산으로 올라가는길
모퉁이를 두손 잡고 걸어가다 산딸기를 따먹던 일..
또 있을 거라며 지난날을 회상하려는 나를 보니 민진이와 한께 했던 추억이 그립긴
그립나 보다.
어느 화창한 봄날.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민진이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쌩쌩 달렸다. 그러다 한마을 골목길에 다다랐을 때 민진이는 나에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끝에 있는 파란 대문 보이지?거기에 이만한 개가 있어. 이 개 디게 성질이 사
나운데 이 자전거를 타고 가면 풀려 있어도 따라오지 못할걸"
아마 민진이의 그때 그 말은 나와 함께 가보자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유난히도 개에
대해 두려움이 많은 나는 가만히 있질 못하고 손만 꼼지락할 뿐이었다.
이윽고 민진이는 자신의 성격에 도달으자, 나에게 신호를 보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는수없이 나는 민진이의 저만치서 자전거를 타고 뒤따랐다. 물론 보이진 않지만 뒤
따라 커다란 걱정도 함께 쫓아오고 있었다.
민진이가 파란 대문앞을 지날때였다. 결국 그 문제의 개가 왈왈거리며 민진이 앞을
가로 막은 것이다. 얼굴이 새파래진 민진이는 자전거와 함께 마을 옆에 자리잡은 논
밭으로 떨어져 나갔다.
"아....악!!"
나는 길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급히 자전거의 핸들을 돌렸다. 빨리 어른을 불러와야
겠다는 생각 반,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반으로 폐달을 힘껏 밟
았다.
한참 뒤에서야 어른들을 불러세우고 헐레벌떡 뛰어온 나는 웬지 민진이가 나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수 있었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한손으로 쓰윽 문지른 후 자전거를 타고 가려는 민진이를 다
짜고짜 붙잡았다.
"민진아 몸도 성치 않은데... 우리 저앞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갈래?"
"됐어!너같이 개가 무서워서 친구를 벌니 애랑은 인사조차도 하기 싫어!!"
그렇게 스쳐가는 민진이의 뒷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함께 했던 우정을 무너뜨리고 마
는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그 일이 4년이 지난후 중학생이 된 나는 같은 반에 민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새삼스레 놀랐다. 하지만 이제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민진이인 이상 나도 이번에 새
로 사귄 진영이와 놀것이고 공부 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햇살이 들어오는 뒷쪽 책상에 앉아 있는 민진이를 볼때면 마음이 이
내 안쓰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단짝 친구 진영이의 생일이 다가 왔다.
"수진아 너 내 생일에 와줄꺼지? 이 초대장 젤 먼저 너한테 주는거야 ,알쥐?"
진영이의 초대장을 받으니 갑자기 민진이의 생일도 이맘 때쯤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하지만 이내 민진이와는 친하지도 않는 데 신경써봤자 라는 생각에 가방을 둘러
맸다.
"수진아, 너 그거 알어?우리반에 수면제 있잖아, 걔 생일도 진영이랑 똑같은 날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진영이는 워낙 인기가 좋으니 나랑 민영이, 선우, 우수랑은 수면제 한
테 가야 겠어,수진이 니가 잘 진영이한테 잘 말해줘~~"
수면제는 다름아닌 민진이다.항상 풀없이 죽어있는 민진이를 보면 아이들이 덩달아
잠이 온다고 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선물가게에 도착했다.새로운 친구 진영이가 좋아하는 시
계가 보였다.
하지만 내 손길은 손목시계가 아닌 조그만 앨범쪽으로 갔다. 1학기 자기 소개할 때
민진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사진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잊을수 없는 일을 가끔씩 떠올릴수 있게끔 필요할때
에 사진을 찍어둡니다."
민진이의 스쳐가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계산대에는 다시 바꿀수 없게 앨범을 포장하는
아주머니의 손길만이 분주할뿐이었다.
어느새 토요일이 왔다. 자기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나를 보며 놀라는 민진이를 생각하
니, 이윽고 섭섭해하는 진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심장이 빨라지는 듯 했다.
학교에서 종례시간이 끝난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멈추게 되었는
데 한길은 진영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민진이 한텐 이제 내가 중요하지 않을꺼야. 내가 가도 반기지 않을 거라구.."
결국 마음을 정리한후 진영이집으로 갔을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민진이에게 가기로 했던 아이들이 보란 듯이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머뭇할 겨를도 없이 다시 발길을 민진이네로 돌렸다. 한 모퉁이를 돌고 또 돌고
또 돌아 왼쪽으로 가니 분홍빛 집이 있었다.
나는 거친숨을 가다듬고 집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순간, 푸짐한 음식상 옆에 웅크리
고 있는 민진이를 발견했다.
"민진이..너 울고 있니?"
"어..어? 너 수진이 아니니? 니가 여긴 웬일로.."
나는 민진이의 말에 선물을 건냈다. 잠시 주춤하던 민진이는 조심히 포장을 뜯기 시
작했다. 그러고는 말을 하지 않고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 눈길에 웃음을 보냈고, 다
시 우리의 우정은 새파랗게 싹트게 된것이다.
그날의 잊지 못할 민진이와의 추억은 지금 낡은 앨범에 고이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