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오빠의 결혼식을 다녀온 나는,그 날도 어김없이 입술을 앙 다물고 눈물을
꾸욱 참아야했다.
[주희엄마는 혼자니까 자네라도 같이 절을 받아줘야지-]
폐백실에서,절을 안 받아도 괜찮다는 둘째 큰어머니의 고집에 천안 고모가
말리고 나섰다.그 때 나와 언니의 가슴은 비수로 갈기고 지나간 듯 쓰라려왔다.
그래,지난 4년동안 잘도 버텨왔었다.까짓거 앞으로 몇 년이다.눈 딱 감고 버텨
보자.그럼 우리 가족에게도 아름다운 봄날이 온다...
하지만 아직도 시리고 혹한 겨울이 가지 않고 있다.그렇게 계속....남아있다.
아빠를 원망한적은 많았다.거제도에 살때부터 늘 서울로 나가있던 아빠를 원망
한적 있었다.친구들이 자기네 아빠가 사준거라며 껌 몇 개를 가지고 으시댈때
는,정말 참을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아마 내 눈물은,그때부터
마를줄을 몰랐나보다.
아빠가 서울에서 돌아와 나에게 어마어마한 액수의 용돈을 주면,나는 신이
나서 슈퍼로 달려가 이것저것 품에 안고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으쓱거렸다.
이것봐라,이 녀석들아.나도 돈 잘 버는 우리아빠가 이렇게나 많이 사줬다,뭐....
아빠옷을 잡고 운적도 많았다.안방에 몰래 들어가 장롱안에 고이 보관된 아빠
의 옷가지를 끌어안고 얼굴을 마구 부빗거린적이 많았다.나는 지독히도 아빠를
그리워하던 어린 막내딸이였다.
우리 아빠의 화통하고 시원스런 성격을 나는 꼭 빼닮았다.나쁜말로 풀이하자면
그만큼 씀씀이가 크고 헤펐기 때문에 그리 좋은점을 닮은건 아니였다.
안정적이던 직장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포부와 미래를 믿은 아빠는 그만큼 쓴맛
을맛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빠는 개인사업을 확장했고,우리 가족은 덩달아 수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
다.예쁜 책상과 침대도 있었다.그러나 무엇보다 내 어린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
던건 가족이란 따뜻함이었다.이제 더 이상 이별은 없기를 바랬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처음에는 잘 되던 사업도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
다.엄마는 동분서주 빚을 지러 다니기 바빴고,아빠는 그 일을 막기에 급급했다.
나는 그때 사춘기를 맞이한 민감한 나이였고,언니또한 막 고등학교를 입학한
새내기였다.지금에 와서야 모든걸 알게됐지만,부모님은 그때 참 많이 힘들어
하셨다....
아빠는 내게 그림을 보여주며 늘 말씀하곤 하셨다.여긴 선희방....여긴 주희
방...그리고 여긴 안방....아빠가 그린 그림은 우리 가족의 꿈이 커나갈 300평
짜리 단독주택이였다.3년내로 그 집을 짓기로 약속했다.새끼 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필리핀이란 낯선 나라로 아빠는 떠났다.정확히 1998년 6월 24일이였다.
그 뒤로 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건 세가족이 쓸쓸히 맞아야 하는 기념일과,또
가장의 빈자리였다.
나는 끔찍히도 외로움을 싫어한다.그래서 누군가에게 부던히 사랑받기를 원하
고 있다.빠듯해진 집안형편에 엄마도 가만히 있을순 없었다.우리 몰래 궂은
일도 다 맡아하셨다.언니도 밖으로 나도는 일이 많아졌다.결국 나는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버렸다.......무서웠다.
이제까지 두 번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아빠....중학교 졸업식날 찾아와준
큰고모와 사촌오빠의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보다 훨씬 행복한 졸업을
맞이할수 있었지만,내가 졸업장을 받는 모습에 큰고모는 눈물을 흘리셨다.나도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을수 있었다.이제껏 참고 잘 커준거 너무나 고맙다고..
너희 고생시켜 정말 미안하다며 나를 잡고 눈물을 흘리던 막내 고모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조촐하게 촛불이 켜진 내 생일 케이크앞에서도,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아빠 사진을 보면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지만,대부분 나는 잘 참고 견뎌왔다.
하지만결혼식에서 엄마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땐 정말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
었다.사촌오빠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정말 다부지게 참아냈다.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의 곁엔,아빠가 없었다.
절을 받을때에도 엄만 쓸쓸하게 혼자 받으셔야 했다.그 모습이 이제껏 잘 참아
온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들었다.돈같은거 필요없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그런거
필요없으니까 아빠가 돌아왔으면 정말 좋겠다 생각했다.정말 너무나 서러운
하루였다...
어쩜 나보다,또 우리보다 먼 타국에서 아빠는 더욱 힘들지 모른다.
우리의 생각으로 모진 생활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젠 더 독해져야한다.
앞으로도 힘들날은 많이 남았을테니까....이 따위 고통들에 나는 쓰러지지 않으
련다.지금껏 겪어왔던 수많은 아픔들도 이제 잊어버리려 한다.나에겐 아빠가
있으니까....
아직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지워진게 아니다.
기다림 뒤엔 만남이란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그럼 그땐 활짝 웃으면서 아빠와 그 녀석을 반겨줄테다.
(저는 지금 고1의 여학생이구요.아빠를 기다리는게 너무 힘이 든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잃지마세요-곁에 없으면 그 빈자리는 정말 가슴 시리게 전해
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