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저 허리 안 아파요."
군대에서 다친 허리 때문에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엎어야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단에 걸터 앉으셨다.
다리를 못쓰시는 분이라 팔로 땅바닥을 집으며 엉덩이를 디미는 형식이었다.
할머니 방문을 열고 계단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지만 계단에 앉아 계신 할머니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젠 엎어야했다. 은연중에 난 2층에서 1층까지의 계단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앙상한 가슴팍이 내 등에 와서 닿았다. 가슴이 아팠다.
일어서는 순간 할머니의 몸이 한 쪽으로 기울면서 흔히 말하는 '어부바'를 해야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아버지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실수를 해서 할머니는 가슴팍에 충격을 받고 몇날 며칠을 끙끙 앓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할머니는 약하셨다. 그래서 불편한 자세 그대로 내려왔다.
휠체어에 앉혀 놓고 나서 한숨을 돌렸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니가 없으니, 휠체어를 밀어줄 사람이 없더라."며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내가 아무리 눈치없기로서니, 밖에 나가고 싶어하시는 할머니 마음을 모를까..
날씨가 너무 덥다는 할머니 말씀에 난 장난기가 발동했다.
"할머니 저랑 같이 철원에 올라가셔야겠네요. 거긴 지금 장갑끼고 다니거든요..^^"
우리 순진한 할머니 입을 꼬무시는게 여간 재미있는게 아니었다.
이불집부터 가자고 하신다. 이불 천 조각들을 챙겨오실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평지 하나 없는 오르막 길이었다.
"힘들제?"
"아니.. 할머니 너무 가벼워서 지금 한 손으로 밀고 있는걸요."
하지만 난 속으로 '이놈의 동네는 왜 오르막길 밖에 없는거야........' 하고 되뇌이고 있었다.
꼬마 아이 한 명이 지나갔다.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짐짓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기어코 말을 걸어온다..
"형, 이 할머니 왜 그래?"
"응.. 다리를 다치셨거든.."
"다리 아프면 거기 앉아야 돼?"
난 눈에 힘을 주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솔직히 내 눈 보고 무섭다는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아이의 순수한 의도를 짓밟는 거 같았지만.. 귀가 어두워 못 듣고 계신 할머니가 이 말을 듣는다면 실망하실테다.
"이불집 아줌마.. 잠깐만 나와주실래요?"
아줌마는 내가 이 말을 하기 전에.. 하시던 재봉질을 멈추고 다가오고 계셨다.
왠 사내 녀석 하나와 휠체어에 앉으신 꼬부랑 할머니가 이불집 유리창 앞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이 꽤나 신경쓰였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할머니는 무슨 보물이라도 품고 있는 양.. 품에 앉고 계시던 비닐봉지를 풀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자부동 두 나(두 개) 해주소.. 그라고 이거 내가 동그랗게 기림(그림) 그리났응께 그대로 잘라가 등받이 만들어주소.."
"......................."
"이게는(여기에는) 카리송 소케 넣어주소.. 그라고.................."
난 할머니의 설명 중 절반도 못 알아듣고 있었지만 베테랑 아줌마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자부동.. 카리송...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듬성듬성 늬비주소.. 야?"
늬비달라니... 난 우리나라 말에 대한 내 지식의 한계를 탓하고 있었다..
"예, 할머니.. 그럼 다 되신거죠?"
"듬성듬성 늬비달라고 내 방금 말했잖소.."
헉.. 우리 할머니 또 못 알아들으신 모양이다.
"아줌마가 알아들으셨대요.. 아주머니 그럼 수고해주세요.."
난 휠체어를 잡고 방향을 틀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단다.
"보소.. 듬성듬성 늬비주소.."
나와 아줌마는 기어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음으로 난 시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매번 가던 코스였다.
"나리야................."
또 누나 이름을 부르신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면 할머니는 곧장 눈치를 채신다.
".........아!........갱아야.(할머니는 날 갱아라고 부르신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내 살께(사고 싶은 게) 더 있다."
"뭔데요? 저녁에 어머니가 시장 가실 텐데.. 그 때 제가 말씀 드릴께요. 쇼핑은 접어두고 손자랑 드라이브나 해요."
"안돼......."
할머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장 안 좁은 길을 통과하여 그릇 집 앞에서 멈춰섰다.
기분 좋게 낮잠을 주무시던 아줌마가 인기척에 놀라 일어나셨다.
"뭐가 필요하세요, 할머니?"
"응.. 그랑께... 내가 짐치통(김치통)이 필요하거든.."
아줌마는 잠시 뒤적거리더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김치통 하나를 꺼내왔다.
할머니는 왠지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머니, 이것보다 더 작은 건 없대요.."
할머니 귀에다 대고 내가 말했다. 아까처럼 할머니가 또 물어보실까봐 그전에 못을 박아 버렸다.
"얼만교(얼마에요)?"
"3500원 인데.. 할머니 얼굴 봐서 3000원으로 해줄께요."
"2500원으로 해주소....."
"안돼요, 할머니.. 이거 팔아서 얼마 남긴다고......."
"갱아야.. 이거 우리 집 앞에는 2500원 한다 아이가.. 그자?"
난 대답 대신 아줌마를 보고 한 번 웃어줬다. 우리 집 앞에서 김치통 파는 가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2500원으로 안하면 내 안 살라요."
"할머니.. 나중에 제가 500원 드릴께요. 그냥 그걸로 사세요."
"싫다................"
할머니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아줌마가 날 보며 또 웃으신다.
"할머니, 2500원으로 할께요. 담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한 번 더 들러주세요..^^"
할머니는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김치통을 품에 앉은 모습이 꼭 어린 아이 갔았다.
집 앞 슈퍼마켓 앞에서 잠시 세우라고 하셨다.
아까 남은 거스름돈 500원으로 내가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왜 그토록 500원에 집착하셨는지 짐작이 갔다.
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두 개 살 돈 되드나?"
"응.. 마침 250원 짜리 아이스크림이 두 개 남았더라구...^^"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도록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와도 따뜻한 문사네요..
오늘도 웃음 가득하시길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