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는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예정에도 없었던 휴가증 하나 손에 쥐고 위병소 문을 나섰다.
아닐꺼야.. 그래.. 아니고 말고.....
버스 타는 곳까지 걸었다. 고추를 말리고 계시던 시골 아주머니는 30분 정도 지나면 버스가 들어올거라고 알려주셨다..
30분이라.....
택시를 타야했다. 하지만..
호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몇 장이 느껴졌다. 부산까지 달려가기에는 빠듯한 주머니 사정이었다.
머리 속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내 손은 이미 택시를 잡기 위해 흔들리고 있었다.
"택시, 여기요!"
10월 9일은 나의 스물 두 번째 생일이었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마찬가지였고, 얼마 전 추석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대에 속해있는 나에게 있어 기념일은 약간의 사치스런 생각일 뿐이었다.
단 한 명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 씩 다가와.. "생일 축하해."하며 어깨를 툭툭 쳐줄 땐, 솔직히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이날 저녁은 특히 기분이 좋았다. 취사반장 봉준이 때문이었다.
작년 4월 달에 같이 입대해서.. 가파른 언덕길을 같이 걸어온 소중한 친구였다.
이날 나의 저녁은 봉준이가 끊여준 참기름이 동동 뜬 따끈한 미역국 덕분에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불렀다.
난 밥 한 그릇 말끔히 비우며...친구가 보내준 따뜻한 선물을 받았다.
식당 청소를 마치고 막사로 올라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문득 전화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곳인데...
이 날따라 텅비어 있는 그 곳이 쌀쌀해진 철원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생일인데 전화나 한 번 할까..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래...
내 손가락은 너무나도 익숙한 어머니 폰번호를 찍고 있었다.
신호벨이 한참이나 울린 후에야 연결이 되었다. 하마터면 끊을 뻔 했다.
"자다가 일어났어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응.. 잔 건 아니고...."
"오늘이 아들 생일인데, 무슨 선물 준비하셨어요?"
"..................."
"혹시.. 설마... 지금 울고 계신거에요? 나 분명히 들었어요.."
"응... 오늘이 아들 생일이잖아. 너무 보고싶어서 우는거야.."
"아이.. 그런게 어딨어... 너무 싱겁잖아.... 얼릉 휴가 받아서 갈께요.... 기다리세요.."
뭔가 이상해... 전화를 끊고 나서 난 한참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회자 집합"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 날은 교회에 가기로 했다.
좀처럼 가지 않던 교회였건만..
인수가 교회에서 생일 케잌을 챙겨준다길래 흔쾌히 따라가겠다고 했다.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찬송가가 이어지고, 전도사님 설교까지.. 하지만 많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깜빡 졸았나보다. 분명 불길한 꿈을 꿨는데..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인수야, 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줘. 나 내려가서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께."
이번에 아까와는 달리 누나번호를 찍었다.
동생 끔찍이도 아끼는 누나의 반가운 인사를 뒤로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집에 무슨 일 있는거야?"
누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실수였다. 그건 나에게 확실한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울고 있는 건 또 뭐고.. 우리 가족들이 나만 속이고 있다는 이 찝찝한 기분은 또 뭐야."
난 확실히 화를 내고 있었고, 누나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 말해줄께. 너무 놀라지는 마.. 아버지는 지금 실명하셨고.. 그리고 어머니는 충격을 많이 받으셨나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눈물은 닦고 싶지도 않았다.
내일 집에 내려가서 내 눈으로 직접 이 거짓말들을 확인해보리라.
집 대문을 밀치며 들어서는데 어머니의 구부정하게 않으신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념에다 무를 절이고 계신 모양이었다.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흠칫 뒤를 돌아보셨다.
"아니 이게.."
난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오른쪽 눈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고..
왼쪽 눈 역시 신경을 한 순간에 끊어버릴 수 있는 높아진 안압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라했다.
이 날도 아버지는 늦었다. 경찰 일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몸 생각도 안하고 밤낮없이 돌아다니시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현관문이 열렸다. 또 나를 보고 웃고 계셨다. 도대체 누가 지금이 웃을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한 손에는 생크림 케잌까지 들고 계시던 아버지였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하신 듯하다.
"도대체 눈은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게 정말 사실이에요?"
내 언성이 또다시 높아졌다.
"쉿! 너 정신 있는거니? 할머니 들으시겠다."
요즘 따라 귀가 어두워지신 할머니는 텔레비젼 볼륨을 잔뜩 높인채 연속극에 푹 빠져계셨다.
그렇구나.. 할머니는 모르시는구나...
"아버지,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되는거에요?"
"그럼.. 아버진 한 쪽 라이트만 켜고도 세상을 밝힐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래도................."
"녀석, 이깟 일로 여기까지 달려온거야?"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의 이런 태도에 당혹스럽기까지하다.
오늘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출근하셨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한 쪽 라이트에 의지한 채...
아버지.. 아버지 깊은 뜻 어찌 모르겠습니까......
항상 고맙고.. 감사하고... 그래요.......
제발.. 오래오래.... 건강하셨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