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그림자 놀이를 본적은 없었다. 어스름한 저녁 그림자가 벽이나 바닥에
진하게 물드는 그런 노을이 지는 시간에, 혼자서 해보는 그림자 놀이는 기껏해
야 엄지와 검지로 입 모양을 만들어 이상한 개 모양이나 닭 모양을 흉내내 보는
그런 정도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오직 나와 내 손가락이 만들어낸 강아지만이
침묵하고 있는 그런 공간의 시간. 황홀한 듯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입이 움직
이는 그림자의 환영을 보고 있노라면 허전함이라는 건 그 자취조차 감추어 버
리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몸의 어딘가에 뚫린 구멍으로 그것이 새어들어온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풍선이 작아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엷은 바람의 한줄기
처럼 새어들어온 그것은 그림자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저 그림자는 무엇이냐'
그 질문은 처음 티비를 통해 멋드러진 그림자 놀이를 본 순간부터 마음 한구석
에 고여진 것이다. 강아지, 공작새, 날아다니는 두 마리의 새, 용의 모습까지
내가 심심풀이로 해봤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현실감이 난다
는 그것 때문이었다. 한참동안 티비속에서 벌어지는 실존같은 그림자 형태에
심취해 놀이가 끝난후 손이 나오고 그 손의 주인공이 등장했을 땐 현기증이
잠시 동안 피어올랐다. 그림자가 빚어낸 현실감에 진짜 현실은 당연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도 시간은 흐르고 난 시간속에서 이유없이 흘러왔다.
지워지지 않는 현기증은 여전히 그것, 그 질문을 동반하고 있었다. 어느 슬
픈 저녁, 시인이 쓴 '물들어 가는 노을은 슬픔이다' 라는 시를 읽고 지붕위에
앉아 정말 슬픈듯이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이면 비가 맑
게 개이듯이 사라져버릴 그 슬픈 노을을 지붕위에 앉아 바라본 것이다. 그렇
게 '내 현실'은 내일이면 사라지는 것이다. 현실감이 나는 그림자가 현실이
아니었듯이, 현실인줄 알았던 티비속의 이미지들이 환상이었듯이 오늘의
슬픈 노을도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시내 한복판의 전광판을 보고,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을
접하는.. 하루가 지나가는 저녁시간이 될 때마다 난 티비속의 황홀했던
그림자 놀이와 손가락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아지랑이 같은 현기증이 찾아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