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자의식을 넘어선 희망의 ‘블랙 유머’
1994년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연수의 첫 소설집 『스무 살』이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을 감싸고 있는 것은 상실과 환멸의 세대 의식이다. 그러나 90년대를 80년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세대 의식을 후일담이나 감상과 분리시키는 소설적 방법에서 김연수는 자각적이다. 그 자각적 방법은 상실과 환멸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지적 긴장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소설집의 살집이기도 한 다양한 문화적 참조물들(예컨대, 보르헤스적 상상력,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프로그레시브 음악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 등)은 상실과 환멸의 실존의식을 감상으로부터 지켜내는 방법론적 항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무 살』은 후일담적 자의식을 넘어서며, 그 넘어선 힘으로부터 자신의 세대를 응시하는 김연수 특유의 ‘블랙 유머’가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망막에 섬뜩한 그리움과 차가운 유희의 잔상을 남기면서, 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넘어선 자들의 희망과 유대가 『스무 살』에 펼쳐진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첫번째로 실린 작품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은 작가 김연수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다. 이 작품은 ‘글쟁이’로서의 자의식을 보르헤스의 「기억의 명수 푸네스」와 「바벨의 도서관」의 모티프들을 활용하여 실험적으로 드러낸 소설이다. 글쓰기가 허무에 도달한 지점에서 새로운 글쓰기가 비롯된다는 작가의 역설적인 자각이 나타나 있다. 「마지막 롤러코스터」는 역동적인 젊음의 이미지가 작가의 폭넓은 상상력과 맞물려 빚어진 꿈 같은 작품이다. 젊음이 가진 순수한 미망과 꿈에 대한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이러한 허무 의식은, 「뒈져버린 도플갱어」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내 안으로 휘말려 들어왔는데, 내가 죽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뒈져버린 도플갱어」)라는 울부짖음은, 깊은 상실과 환멸에서 자라난 아픔을 기묘하게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에서는 이복형제의 분열적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의 이미지에 실려 따뜻하게 그려진다. 연작 단편인 〈죽지 않는 인간〉―「중세의 가을」 「카르타필루스」 「기억의 어두운 방」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되, 그렇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죽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운명이란 자기 의지와는 절대로 무관한 것이라는 감각적 인식으로 점철된 이 작품은 예수와 더불어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온갖 병을 다 앓아야 하는 카르타필루스의 기다림에 내포된 슬픔을 그린다. 이러한 슬픔은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뿌리를 내린 젊음들의 공통분모이자 우리들의 현재를 지배하는 강력한 정념에 다름아니다. 표제작인 「스무 살」에서는 이러한 정념이 서정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는 작가의 말처럼, 단절되어버린 한 시기에 대한 그리움은 이 작품에서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젊음’을 지금여기에서 앓는 문학
김연수는 젊고, 그 젊음만큼이나 길 위에 있는 작가다. 뻣뻣하게 소설 밖으로 서걱이는 문체나 잡식성의 이야기 취재는 그 도상의 해찰이 만만치 않음을 역으로 반증한다. 그러나 김연수는 80년대와 90년대의 단절을 ‘지나간 것’으로 앓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앓고 있다. 이 느린 진정성이야말로 김연수 문학의 ‘젊음’을 보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해설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놓았다.
김연수의 『스무 살』을 떠받치고 있는 동력은 ‘스무 살’로 표상되는 젊음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젊음의 사실적 기록이 아니며, 젊음의 일방적 과시도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세계에 흡수되지 못하고 떠도는 젊음의 에너지에 대해 사유함이고, 또한 거기에서 빚어지는 세대적 자의식을 고통스럽게 앓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연수에게 ‘스무 살’은 한번 발화된 후 사라져버리는 감탄사가 아니라, 현재와 뒤섞이고 그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면서 시간 속을 떠다니는 공백의 기표가 된다.
김연수는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장편소설 『7번국도』를 냈다
1994년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연수의 첫 소설집 『스무 살』이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을 감싸고 있는 것은 상실과 환멸의 세대 의식이다. 그러나 90년대를 80년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세대 의식을 후일담이나 감상과 분리시키는 소설적 방법에서 김연수는 자각적이다. 그 자각적 방법은 상실과 환멸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지적 긴장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소설집의 살집이기도 한 다양한 문화적 참조물들(예컨대, 보르헤스적 상상력,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프로그레시브 음악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 등)은 상실과 환멸의 실존의식을 감상으로부터 지켜내는 방법론적 항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무 살』은 후일담적 자의식을 넘어서며, 그 넘어선 힘으로부터 자신의 세대를 응시하는 김연수 특유의 ‘블랙 유머’가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망막에 섬뜩한 그리움과 차가운 유희의 잔상을 남기면서, 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넘어선 자들의 희망과 유대가 『스무 살』에 펼쳐진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첫번째로 실린 작품 「공야장 도서관 음모 사건」은 작가 김연수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다. 이 작품은 ‘글쟁이’로서의 자의식을 보르헤스의 「기억의 명수 푸네스」와 「바벨의 도서관」의 모티프들을 활용하여 실험적으로 드러낸 소설이다. 글쓰기가 허무에 도달한 지점에서 새로운 글쓰기가 비롯된다는 작가의 역설적인 자각이 나타나 있다. 「마지막 롤러코스터」는 역동적인 젊음의 이미지가 작가의 폭넓은 상상력과 맞물려 빚어진 꿈 같은 작품이다. 젊음이 가진 순수한 미망과 꿈에 대한 허무가 짙게 배어 있다. 이러한 허무 의식은, 「뒈져버린 도플갱어」나 「구국의 꽃, 성승경」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내 안으로 휘말려 들어왔는데, 내가 죽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뒈져버린 도플갱어」)라는 울부짖음은, 깊은 상실과 환멸에서 자라난 아픔을 기묘하게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에서는 이복형제의 분열적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의 이미지에 실려 따뜻하게 그려진다. 연작 단편인 〈죽지 않는 인간〉―「중세의 가을」 「카르타필루스」 「기억의 어두운 방」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되, 그렇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죽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운명이란 자기 의지와는 절대로 무관한 것이라는 감각적 인식으로 점철된 이 작품은 예수와 더불어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온갖 병을 다 앓아야 하는 카르타필루스의 기다림에 내포된 슬픔을 그린다. 이러한 슬픔은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뿌리를 내린 젊음들의 공통분모이자 우리들의 현재를 지배하는 강력한 정념에 다름아니다. 표제작인 「스무 살」에서는 이러한 정념이 서정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는 작가의 말처럼, 단절되어버린 한 시기에 대한 그리움은 이 작품에서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젊음’을 지금여기에서 앓는 문학
김연수는 젊고, 그 젊음만큼이나 길 위에 있는 작가다. 뻣뻣하게 소설 밖으로 서걱이는 문체나 잡식성의 이야기 취재는 그 도상의 해찰이 만만치 않음을 역으로 반증한다. 그러나 김연수는 80년대와 90년대의 단절을 ‘지나간 것’으로 앓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앓고 있다. 이 느린 진정성이야말로 김연수 문학의 ‘젊음’을 보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손정수는 해설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놓았다.
김연수의 『스무 살』을 떠받치고 있는 동력은 ‘스무 살’로 표상되는 젊음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젊음의 사실적 기록이 아니며, 젊음의 일방적 과시도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세계에 흡수되지 못하고 떠도는 젊음의 에너지에 대해 사유함이고, 또한 거기에서 빚어지는 세대적 자의식을 고통스럽게 앓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연수에게 ‘스무 살’은 한번 발화된 후 사라져버리는 감탄사가 아니라, 현재와 뒤섞이고 그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면서 시간 속을 떠다니는 공백의 기표가 된다.
김연수는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장편소설 『7번국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