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글이 위태롭다
우리의 말과 글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요즘 우리가 듣고 보는 말과 글은 이미 우리의 것을 잃어버리고 낯선 형태로 탈바꿈하고 있다.
우리말과 한글은 현존하는 세계 7,000여개 언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데도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마구 쓰이는 바람에 근본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말은 자기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상대방의 뜻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손짓 발짓과 얼굴표정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약간에 그친다. 감정과 진정성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언어만큼 유용한 도구가 없다.
그래서 고대와 현대, 지역 간, 인종 간, 계층 간, 남녀노소 간 각기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와 구사방법에 다름이 존재한다. 수많은 언어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과 글은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일제의 강점기 동안 우리의 선배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도 바로 말과 글을 잃어버림으로 해서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경각심 때문이었다. 해방을 맞은 뒤 우리말에서 일제의 대표적 잔재인 일본말을 벗겨내는 데에 거의 한세대가 걸렸다. 그리고 나서야 경제부흥과 민주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언어의 침략을 받고 있다. 영어라는 괴물이다. 우리가 소위 세계화로 지구촌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사용인구가 많은 영어를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몰입은 아닌 것이다. 외국어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부수적인 소통도구일 뿐 우리의 기본 소통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몇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첫 번째는 3~4명씩 모여 앉아 10분 동안 영어단어를 한 개 사용할 때마다 1점씩의 벌점을 받도록 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20 점이 쌓였고 10분이 지난 뒤에는 32점에 이르렀다. 게임을 중지하고 녹음을 재생하면서 검토해보았다. 평균 다섯 마디에 한 마디씩 영어를 사용했다. 라디오 텔레비전 등 토착화된 단어를 제외하고서였다.
다음엔 사용한 영어단어 대신 우리말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토의했다. 사용빈도가 높은 단어는 스트레스, 센서티브, 딜레이 등이었다. 이 가운데 스트레스의 대치 언어를 찾아보도록 했다. 억압, 긴장 등을 쉽게 말했다. 다음은 짧은 문장을 만들기로 했다. ‘새로 온 부장한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 대신 ‘부장이 새로 와 꽤 긴장돼.’ 의 두 대화 중 어느 쪽의 표현이 더 쉽게 와 닿느냐 했더니 대부분 전자를 들었다.
그리고 딜레이를 주제로 토론했다. ‘비행기가 딜레이 되는 바람에 생고생 했어.’ 대신으로 ‘비행기가 지연되어 생고생~’ ‘비행기가 늦게 도착 생고생~’ ‘비행기 연착으로 고생 좀 했지’ 등의 답이 나왔다. 토론에서 굳이 딜레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다수였던 것을 보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남대문 소실, 국보1호, 1398년 건립’을 내용으로 단문을 짓도록 했다. ‘ 1398년에 지어진 국보1호 남대문이 완전히 불탔다.’가 대표적인 답안이었다. 우리의 어법과 문법은커녕 영문법에도 맞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의 문제는 ‘지어졌다’는 타동사이다. 우리말에는 ‘지어진 건물’ ‘쓰여진 책’ 등의 타동사와 수동태 표현이 거의 없다. 국어사전에 ‘지어지다’라는 단어는 없다. 또 영문법에서 수동태를 쓰려면 일반적으로 ‘~에 의해서’라는 문구가 따라주어야 한다.
최근 아주 많이 팔린다는 인기서적을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었다. 꽤 유명한 사람이 번역을 했다는데 차라리 원문을 구해 읽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글자만 한글일 뿐 우리말의 표현과 어법이 아니어서 읽기가 거북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그는 뿔뿔이 헤어진 그의 가족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의 가족들은 어디에선가 각각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가족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그의 가족들을 찾는데 아무리 많은 비용을 들인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이 듣거나 읽고 있는 말과 글이 대부분 이러한 형태다. 우리말과 글이 아닌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주어, 특히 인칭대명사를 가급적 생략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표현의 중점은 목적어와 동사에 있다. ‘어디 가니?’ ‘밥 먹었니?’ ‘전화할 게.’이지 ‘너 어디 가니?’ ‘너 밥 먹었니?’ ‘너에게 전화할 게.’처럼 영문표현에서 중점을 두는 주어 또는 인칭대명사가 무시된다.
영문을 번역할 때 이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직역하여 삽입하면 그것은 영문의 한글 작업이지 우리말번역은 아니다. 또 있다. ‘가족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이다. 이 역시 우리말의 특징인 단․복수 무시를 모르는데서 나온 오류다. ‘가족들’이라면 나의 가족이 있고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달리 거느리는 가족이 있을 때에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영어야 주어의 단․복수에 따라 인칭대명사와 동사가 바뀌는 문법이지만 국어는 괘념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등은 전형적인 서구식 표현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표현은 오로지 일본식 표현이다. 우리말에는 없는 표현이고 감정이다. 하기야 나폴레옹의 전기에 나오는 ‘나는 불가능을 모른다.’가 우리에게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라고 전해져 오고 있는 실정이다. 바른 번역이라면 ‘나는 불가능이란 단어를 모른다.’일 것이다.
서두에 지적한 것처럼 말과 글은 소통의 수단이다. 소통이 잘 되려면 서로 잘 통하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과 심오한 철학을 얘기해도 그 깊이와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손짓 발짓만 못하고 장단 맞지 않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말과 글은 또 정체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계화를 논하고 선진화를 논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중심에 서기 위해서이지 지금의 선진문물국가의 들러리가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내세울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신 있게 내세울 것 중의 첫 번째가 우리의 정체성인 말과 글이다. 외국어를 잘 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외국어에 종속시키면 우리의 정체성도 종속되고 만다.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는 많이 배운 자, 힘 있는 자, 영향력 있는 자가 사명감을 갖고 앞장서야 한다. 후학을 가르치는 사람, 계도할 책임이 있는 언론, 온통 시선을 빼앗고 있는 영상매체의 올바른 말과 글의 사용의지와 노력이 절대 요구된다.
필자는 얼마 전 ‘미래는 어른에게 달려있다’라는 주장을 편바 있다. 미래의 주역은 청소년이지만 그 주역을 주역답게 가꾸는 책임은 어른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에 몰입하여 영어 하나만큼은 어른을 뺨치게 잘 하지만 우리말을 하라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언행은 물론이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면 이에 대한 책임 또한 어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곳 문사가 우리의 말과 글을 착실히 지켜가는 교두보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음은 '좋은 글 쓰기' 강좌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