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시를 써본 일이 없거나 처음 시창작을 시작하는 사람들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습작시 유형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예이다.
하이얀 구름이 둥실둥실
빌딩 숲 사이로 저 멀리서 오락가락
쏟아지는 불볕은 대지를 뜨겁게 뜨겁게
남영동의 좁은 공간 창밖을 보니
봉고 포니 그랜저 벤츠 프라이드 르망.....
줄을 잇는다 이글거리는 시멘트 위를
파아란 하늘이 가없이 퍼져
겸푸른 바다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넓고 넓은 저곳에 누가 살고 있을까
그곳은 피안으로나마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파도는 밀려와서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져
물거품만 남기고 어이 사라져가는가
인생도 파도처럼 돌고 돌아 부딪치고 부서져
어디로 사라져가는 건가 [도시의 여름]
결론부터 말하면 이와 같은 유형의 시를 쓰는 사람은
시에 관해 관습적 인식에 젖어 있는 경우에 속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습적 인식이란 자신의 시에 관한 얕은 이해를
의심해보지 않고, 열정만가지고 무작정 시를 쓰는 태도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시를 쓴다거나 시를 이해하는 데는 이 관습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언젠가 본 일이 있는
또는 기억에 남아 있는 시와 비슷하게
훙내를 내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흉내는, 기이하게도,
시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상투적인 표현만을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관습적 인식은
개괄적으로 말하면 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의 부족이 그 원인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엉켜 있다. 우선 국어 사전을 보자.
국어 사전에는 시를 "풍경, 인사 따위 일체의 사물에 의하여 일어난 감흥이나
상상 따위를 일종의 리듬을 갖는 형식에 의하여 서술한 것" 으로
정의하고 있다.그러니까,
하이얀 구름이 둥실둥실
빌딩 숲 사이로 저 멀리서 오락가락
쏟아지고 불볕은 대지를 뜨겁게 뜨겁게
라는 시구는 분명히 한 순간의 여름 풍경을 보고 "일어난 감흥을 리듬을
갖춘 형식에 의하여 서술"한 것이므로 시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하얀'이라는 형용사를 '하이얀'이라고 적고 '뜨겁게'라는 형용사를
'뜨겁게 뜨겁게'라고 반복하거나, '둥실둥실' '오락가락'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여름의 풍경에 관한 감흥을 아름답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표현 속에는 우리가 어릴 때 읽은,
하늘은 하늘은
파아란 도화지
파아란 도화지엔
하아얀 구름 그려놓고 ----어효선, [하늘]
꽃밭에서는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핀
꽃밭에서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호호호....
예쁜 꽃들의 웃음 소리가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호호호..... ----어효선, [꽃밭]
라든지.
저기서 반짝, 별이 총총,
여기서는 반짝, 이슬이 총총,
오며 가면서는 반작, 반딧볼 총총,
강변에는 물이 흘러 그 소리가 돌돌이라. ----김소월, [七夕]
라는 시에서 시인들이 흔히 사용한 수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얗다'는 형용사를 '하이얀'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하아얀'이라고 꾸며 적고 있는 형태와 닮았으며, '오락가락''둥실둥실'
이라는 의태어를 부사로 사용하고 있는 점은 '하하하 호호호'
또는 '총총''돌돌'이란 부사형 의성,의태어 사용과 닮았다. 뿐만 아니라,
봉고 포니 그랜저 벤츠 프라이드 르망.....
이라는 나열식의 표현도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과 같은
열거법과 다르지 않다.
파도는 밀려와서 바위에 부딪히고 부서져
물거품만 남기고 어이 사라져 가는가
인생도 파도처럼 돌고 돌아 부딪치고 부서져
어디로 사라져가는 건가
라는 구절도,
우리는 앞뒤를 바라보며
지금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법
진심의 웃음에도
어떤 괴로움은 차 있고
가장 감미로운 노래는 가장 슬픈 생각을 전하는 노래
-----셀리, [종달새에게]
와 같은 시구와 어딘가 일맥상통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