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니
1. 친구
"학교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송이의 얼굴이 무척 밝습니다. 오늘은 2학년 새학기 첫날입니다.
"엄마, 내 짝 이름이 다은이다. 다은이가 내일 빨간색 학종이를 준대. 나도 피카츄 지우개를 줄 거야. 엄마, 나 다은이랑 짝이 돼서 너무 좋아." 송이는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좋겠구나. 엄마도 송이처럼 짝궁이 있었는데."
"정말?"
"응. 엄만 경기도에서 여덟 살까지 살았었지. 거기 살 때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거든."
엄마의 말씀에 송이의 눈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엄마가 여덟 살? 그럼 지금 송이보다 더 작은 꼬마였을 때입니다. 송이는 자기보다 더 작은 꼬마 엄마를 상상해보았습니다.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보여줄까?"
엄마는 장롱 위에서 나무상자를 꺼냈습니다. 뚜껑을 열었더니 낡고 바랜 사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지금의 엄마처럼 젊고 예뻤습니다. 할머니가 물방울 원피스를 입고 작은 꼬마를 안고 있는데, 그 꼬마가 바로 엄마랍니다.
엄마가 살던 곳은 참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높은 건물도 없고, 매연을 뿜는 자동차도 없고, 딱딱한 아스팔트길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여기 있다. 아이구! 그런데 얼굴이 가려져 버렸네."
사진 속, 엄마의 단짝 친구는 엄마 손을 잡고 갑자기 어딜 뛰어가려 했나 봅니다. 까만 단발머리에 통통한 팔, 빨간 구두를 신은 다리가 조금 보였을 뿐입니다.
"엄마, 그 친구 이름이 뭐야?"
"이름?"
엄마는 꼭 송이네 반 장난꾸러기 남자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꾸- 니-. 꾸니였어."
꾸니? 송이는 입속으로 꾸- 니- 라고 천천히 불러 봅니다.
"이상한 이름이지? 사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 엄마만 그 친구를 꾸니라고 불렀지."
원래는 '꾸니'라는 이름이 아니라구? 엄마만 그렇게 불렀다구? 그럼 송이도 다은이를 다은이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일까요?
"엄마는 꾸니하고 뭘 하면서 놀았어?"
"응?"
엄마는 처음으로 꾸니와 했던 소꿉놀이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2. 소꿉놀이
"우린 소꿉놀이 장난감이 별로 없었지." 엄마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그래도 소꿉놀이 재료는 많았으니까."
둘은 번갈아 가며 엄마를 했답니다. 한 사람은 흙으로 밥을 짓고 한 사람이 장을 봐왔습니다.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오면 바구니에 반찬거리가 가득했습니다.
무슨 반찬이냐구요? 아카시아 꽃잎이랑…아카시아 꽃잎은 정말 먹을 수 있었습니다. 꽃을 먹을 때는 꼭 벌이나 나비가 된 기분이었답니다. 봄에는 쑥이나 냉이를 캐서 물을 넣고 국을 끓이는 시늉을 했습니다. 토끼풀로 나물을 무치고, 이끼를 긁어와서 진흙과 같이 버무리기도 했습니다. 담벼락에 피어있는 민들레도 좋은 반찬거리였습니다. 잎사귀를 따서 으깨면 초록색 즙이 나오는데 그 즙을 노란 꽃잎에 부어서 향기 나는 반찬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 해도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호박꽃이었답니다. 꽃을 따면 호박이 잘 열리지 않는다고 어른들에게 혼이 났지만, 호박꽃 하나면 진수성찬이었습니다. 호박꽃은 쪼글쪼글하고 길죽한 못생긴 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잎 색깔은 아주 고왔습니다. 꽃잎을 잘게 찢어서 빨간 벽돌을 빻아 만든 고춧가루로 무치고, 꽃술은 으깨어서 양념으로 썼습니다. 이렇게 상을 차리고 앉아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친구를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아! 배부르다."
"잘 먹었다."
꾸니는 가끔 방앗간 주인도 했습니다. 세발 자전거를 거꾸로 세워 놓고 빨간 벽돌가루나 흙을 뿌리면서 바퀴를 돌리는 겁니다.
"꾸니 아줌마, 고춧가루 좀 빻아주세요."
"네. 빨리 해 드리죠."
그 후로 송이는 엄마께 꾸니 아줌마 얘기를 해 달라고 자주 졸랐습니다. 엄마는 꾸니 아줌마라는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그래, 그 친구도 지금쯤 우리 송이 만한 아이가 있을 거야."
3. 송충이
송이가 다은이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송이 왔니? 다은이도 왔구나. 그런데 너희들 무슨 일 있었니?" 엄마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송이는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우리 반 남자아이가 송충이를 잡아서 겁을 주며 쫓아 왔어."
송이와 다은이는 송충이가 너무 징그러웠습니다. 흐물흐물한 몸통에 징그러운 털이 덥수룩하고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송충이는 이 세상 여자아이들이 다 싫어하는 벌레일 겁니다.
"엄마와 꾸니도 송충이를 무서워했지. 엄마와 꾸니가 송충이 굴을 지날 때 말이야…."
엄마는 간식을 만들면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살던 동네는 초등학교가 아주 멀리 있었단다. 엄마가 아직 일곱 살 때였으니까 학교 갈 일은 없었지만, 가끔 색연필이나 종이인형을 사러 학교 옆 문방구점에 가곤 했지. 가는 길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굴이 바로 '송충이 굴' 이었단다."
송충이들이 한여름에 뜨거운 햇볕을 피해 서늘한 굴속으로 모여들어서 천장에도 벽과 바닥에도 온통 송충이들로 가득했습니다. 한번은 할머니하고 같이 그 굴을 지난 적이 있는데, 엄마는 할머니 등에 업혀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답니다.
송이와 다은이는 서로 마주보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던 그 해 여름, 엄마와 꾸니는 종이인형을 사러 가고 싶었지. 하지만 송충이 굴을 지나려니 너무 끔찍했어.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꾸니랑 엄마는 결심했단다. 용감하게 송충이 굴을 지나서 종이인형을 사러 가기로 말이야. 그런데 막상 굴 앞에 서니 어두운 굴속에서 송충이들이 털을 세우고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단다. 그런데 꾸니가 엄마 손을 붙잡고 굴로 들어섰어. 굴속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데 송충이들이 점점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어."
그때 엄마와 꾸니는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걸어갔답니다. 그 굴을 통과할 때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굴을 다 지나왔을 때 두 사람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인형을 사 가지고 돌아갈 때 둘은 눈 딱 감고 뛰어가기로 했습니다. 저 멀리 굴 입구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뛰기 시작해서 굴로 들어섰을 때는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발 밑으로 송충이가 막 깔리는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섰습니다. 그래도 금새 굴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면서 둘은 내내 풀숲에 신발을 문질러 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종이 인형을 오릴 때에야 둘은 조금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우린 여름에 절대로 송충이 굴 근처엔 가지 않았지."
4. 잠자리
"송이야, 오늘은 무슨 책 읽어줄까?"
엄마는 잠자기 전에 송이에게 항상 책을 읽어 주십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송이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을 오르기도 하고, 세찬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왕자님과 공주님, 나쁜 마녀나 요정도 만나구요. 또 어떨 땐 동물들과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송이는 엄마에게 또 꾸니 아줌마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럼 엄마가 잠자리 잡던 얘기 해 줄까?"
송이는 작년 여름 방학 때 사촌들과 같이 일영 물가에 놀러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머리위로 까만 날개의 잠자리가 날아다녔는데 잠자리는 좀처럼 진득이 앉아 있지 않아서 결국 송이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되면 잠자리가 참 많았단다. 엄마랑 꾸니는 양파 주머니로 만든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잘 잡았지. 한 손에 잠자리를 세네 마리씩 끼우고 서로 자랑하기도 했어."
엄마는 그 일이 눈에 선하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한참 날개가 접혀 있어서 놓아주어도 날지 못하는 잠자리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날 수 있을 때쯤 다시 잡으며 약올리기도 했어. 잠자리가 불쌍하다고? 하지만 집에 갈 때는 꼭 놔주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꾸니가 비밀을 가르쳐 준다고 우쭐대면서 '잠자리 속이는 법 가르쳐줄까?' 하는 거야."
송이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럼 잠자리를 잘 잡을 수 있을까요?
꾸니가 말했답니다.
"저 쪽 공터에서 팔을 들고 검지손가락을 세우고 서 있으면 잠자리는 네가 나무인 줄 알고 손가락에 앉는다. 정말이야. 그런데 정말 나무처럼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잠자리를 속일 수 없어. 잠자리가 얼마나 똑똑한데!"
자신 있게 말하는 꾸니 앞에서 엄마는 믿지 않는 척 했지만 나중에 혼자 공터에 갔습니다. 머리위로는 빨간 고추잠자리가 예쁘게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떨리는 마음으로 팔을 높이 들어 귀에 바짝 대고 잠자리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팔이 아프고 땀도 났습니다. 잠자리들은 그렇게 꼼짝 않고 나무처럼 서 있는데도 엄마를 나무로 믿지 않았나 봅니다. 엄마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속으로 '난 나무다. 난 나무다.' 하고 되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있으니 '정말 내가 나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발은 꼼짝없이 바닥에 붙어 버리고 팔은 가지처럼 뻗어 있었습니다. 따뜻한 햇살을 온 몸으로 받고 공기 속 물기를 다 빨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살랑살랑 부는 상냥한 바람은 몸을 통과하고 주위에 가득한 향기로운 풀 냄새가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엄만 정말 나무가 된 기분이었단다."
지금도 그때의 맑은 공기, 햇살, 바람이 엄마의 몸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송이도 꼭 나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송이야, 바로 그 때 잠자리가 엄마 손가락에 앉았단다."
"정말? 정말 잠자리가 엄마 손에 앉았어?"
"그럼 정말이지."
엄마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엄마가 잠자리를 속이고 잡은 거야?"
"응? 아니야. 엄마는 잠자리를 잡지 못했어."
"왜?"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잠자리를 잡을 수 있겠니? 엄만 잠자리가 날아갈 때까지 꼼짝도 않았단다. 이건 꾸니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이야."
엄마는 송이에게 눈을 찡긋했습니다.
"자 송이야, 이제 자야지. 좋은 꿈꾸고 잘 자라."
송이는 엄마가 나가신 후에도 한참동안 눈이 말똥말똥 했습니다. 엄마가 잠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송이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잠자리가 손가락에 앉았을 때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잠자리는 정말 엄마가 나무인 줄 알았을까? 그 때 엄만 정말 나무가 되었던 것일까?'
송이는 또 꾸니 아줌마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장난꾸러기 같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참! 꾸니 아줌마한테 나 같은 딸이 있지 않을까? 내일 엄마한테 물어 봐야지. 만약 있다면 난 그 친구를 뭐라고 부를까?'
송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5. 꿈
송이는 조그마한 공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작은 들꽃들이 노란 꽃잎을 보일 듯 말듯하게 숨겨 놓고 있습니다. 송이는 발을 굴려 보았습니다. 흙먼지가 일어납니다. 땅에서부터 솟는 구수한 냄새와 멀리서부터 바람이 실어 온 꽃향기가 어우러져 송이의 기분이 점점 상쾌해졌습니다.
송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저 쪽 채소밭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작은 돌산 옆에는 조그만 굴이 하나 있습니다. 아! 송이는 그제서야 생각났습니다. 이곳은 엄마가 살던 곳입니다. 분명히 저 굴이 송충이 굴 일 것입니다.
송이는 신이 나서 한달음에 언덕을 내려 왔습니다. 마을까지 가는 길엔 키 큰 해바라기가 쭉 늘어서서는 송이를 환영한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고, 고추잠자리들도 춤을 추고 있습니다.
엄마가 살던 집은 어디 있을까? 기웃기웃 골목길을 돌아 나가는데 엄마에게 들었던 파란색 대문이 보입니다. 대문 앞에서 송이는 심호흡을 했습니다.
'이 안에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송이가 머뭇머뭇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한 여자아이가 뛰어 나왔습니다. 검고 윤이 나는 단발머리에 통통한 얼굴, 작은 두 눈은 반짝이고 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 갈색 치마에 빨간 구두를 신은 아이입니다. 송이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넌 누구니?"
그 아이가 송이에게 물었습니다.
"응 나? 난, 난 송이야."
그 아이는 자기를 '꾸니'라고 하고는 송이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넌 내 친구랑 무척 닮았구나. 우리 저기 공터로 놀러 가지 않을래? 친구가 서울로 이사를 가 버려서 난 심심해. 내가 들꽃으로 꽃반지 만들어 줄게."
송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꾸니는 송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청개구리 잡던 이야기, 꽃 따다가 벌에 쏘인 이야기, 작년 겨울에 허리까지 왔던 날 만든 눈사람이야기, 고드름으로 칼싸움했던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송이는 향기로운 풀 냄새,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