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유미, 이제 막 4살이 되었어요.
누가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으면 손가락 네 개를 펴면서 '네 살이요.'하고 대답도 할 수 있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데요.
우리 집은 시장 끝에 있어요. 그래서 놀이터에 가려면 쌀집 하나와 과일가게 하나, 문방구 하나, 그리고 반찬 가게 몇 개를 지나야 해요.
그러면 시장 한 가운데에 있는 넓은 놀이터가 나와요.
그네도 많고요, 미끄럼틀도 있고 철봉도 있어요. 그리고 모래가 아주 많아서 신나는 모래놀이도 맘껏 할 수 있어요.
유미는 놀이터에서 노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매일 엄마하고 놀이터에 나와서 놀아요.
유미가 노는 놀이터에는 놀이터를 지키는 아저씨가 있어요. 밤이건 낮이건 놀이터 한 쪽 구석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어요.
놀이터를 잘 지키기 위해서 잠도 놀이터에서 그냥 자요. 신문지를 덥고요.
어른들은 놀이터 지키는 아저씨를 '노숙자'라고 불러요.
우리 엄마도 놀이터 의자에서 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도 가끔씩 놀이터 아저씨가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자주 아저씨가 있는 곳을 쳐다봐요.
하지만 아저씨는 변함 없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놀이터를 잘 지키고 있어요.
내가 놀다가 아저씨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고 하면 우리 엄마는 얼른 뛰어와서 그러지 못하게 말려요.
아마도 내가 아저씨께 방해가 될까봐서 그러나 봐요.
아저씨는 그렇게 아무하고 말도 하지 않고 늘 놀이터만 지켜요.
힘이 많이 드는지 낮에도 누워 있을 때가 많아요. 그리고 가끔은 소주라고 불리는 아주 쓴 물을 마시기도 해요.
저녁이 되어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시면 엄마는 오늘 하루 유미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았는지를 일일이 다 아빠한테 얘기해요.
그런데 엄마는 창피하게 유미가 넘어져서 엉엉 운 이야기까지 아빠한테 하는 거 있죠?
그리고 놀이터 아저씨 얘기도 했어요. 엄마하고 아빠는 그 놀이터 아저씨에게 관심이 많은가 봐요.
엄마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교육상 좋지 않다'라는 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아빠에게 이사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러자 아빠는 어디에 얘기해서 차라리 내쫓아야 한다고 했어요. 모두 그 놀이터 아저씨를 두고 하는 말 같았어요.
유미는 '교육상 좋지 않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놀이터 아저씨 옷에 묻은 흙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손과 발을 깨끗이 하고 옷도 깨끗이 입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놀이터 아저씨가 잘 씻지 않고 옷에도 흙이 많이 묻어 있으니까 내가 그걸 배울까봐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미는 속으로 결심했어요. 내일부터는 손에 묻은 흙도 더 열심히 털어 내고 옷도 깨끗이 입을 생각이에요.
유미는 놀이터 아저씨가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게 싫거든요. 왜냐하면 그러면 그 아저씨는 잘 곳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전에 내가 엄마한테 저 아저씨는 왜 만날 놀이터에서 자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그랬거든요.
저 아저씨는 집이 없기 때문에 놀이터에서 자는 거라고.
그러니까 놀이터에서 쫓겨나면 이제 잘 곳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놀이터에서 자는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 데요, 예전에 유미도 아저씨를 따라서 놀이터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자는 척 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유미가 나이만큼 손가락을 다 세우지도 못할 만큼 어린 아기 때였어요.
놀이터 한 쪽 구석에서 자는 아저씨를 따라 흉내를 내 본 건데 엄마는 그 걸 보고 막 엉덩이를 때리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야단치는 거예요.
유미는 그 때 엄마가 왜 그렇게 당황하며 화를 내는지 잘 몰랐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유미는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요.
그 때 유미도 아저씨처럼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어야 했어요. 그래야 옷에 흙이 안 묻으니까요.
그래서 엄마가 화를 낸 거예요.
유미는 그 날 이후로 다시는 땅바닥에 눕지 않았어요. 엄마가 또 그러면 정말로 야단칠 거라고 했거든요.
우리 엄마는요 평소에는 상냥하고 잘 웃지만 한 번 화나면 정말로 무서워요.
그리고 유미는 엄마 아빠랑 사는 따뜻한 집이 있으니까 땅바닥에서 잘 필요가 없잖아요. 졸리면 집에서 자면 되거든요.
그래서 유미는 놀이터 아저씨가 더 불쌍한 것 같아요. 아무리 추운 날에도 놀이터에서 자야하니까요.
추운 날 땅바닥에서 자면서 놀이터를 지키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지만 요즘은 날이 따뜻해서 아저씨도 놀이터를 지키기가 훨씬 쉬울 거예요. 밤에도 춥지 않거든요.
한 번은 유미가 엄마한테 아저씨는 왜 집이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러자 엄마는 놀이터 아저씨가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은 대가를 받는 거라고 했어요. 열심히 산다는 게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유미가 좀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정말로 열심히 살 생각이에요.
유미는 집이 없어서 길에서 자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놀이터 아저씨처럼 언제나 웃지도 않고 멍하게 아이들 노는 것만 쳐다봐야 하잖아요.
그리고 소주라는 쓴 물을 마시면서 몰래몰래 훌쩍훌쩍 울어야 하잖아요.
유미는 전에 아저씨가 벽을 바라보며 혼자서 몰래 우는 것을 본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았어요. 아저씨가 창피해 할까봐요.
유미는 오늘도 또 놀이터에 왔어요. 집에서 혼자 놀려면 심심하잖아요.
유미는 엄마가 밀어주는 그네에 앉아 놀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도 그 소리 때문에 그네 미는 것을 멈추고 울고 있는 아주머니를 쳐다봤어요.
그 아주머니는 다 큰 어른이 창피한 것도 잊고 놀이터 한 가운데서 엉엉 울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 참 있으니 삐뽀삐뽀 하며 경찰 차까지 왔어요.
모두들 난리가 났지요. 모두들 아주머니 곁에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들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엄마까지도 간식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집에 갈 생각은 않고 아주머니와 경찰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경찰 아저씨들도 아주 바빠 보였어요.
아주머니의 아이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모두들 없어진 아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어요.
그리고 노숙자도 찾아야 한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바로 놀이터 아저씨 말이에요.
놀이터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아마 그 아주머니 아이하고 놀이터 아저씨하고 같이 없어졌나봐요.
그래서 모두들 두 사람이 걱정돼서 저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는 거 같아요.
구경하는 사람들 중엔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세상에 진작에 쫓아냈어야 하는 건데."
"아이고, 어쩌면 좋아. 불쌍해라."
사람들은 놀이터 아저씨하고 아이가 같이 없어진 게 아주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어요.
모두들 놀이터 아저씨를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이를 데려가 버린 거라고.
그 날 저녁 엄마하고 아빠는 한 참이나 놀이터 아저씨와 없어진 아이 얘기를 했어요.
엄마하고 아빠도 놀이터 아저씨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유미는 엄마 아빠의 얘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요.
꿈에서 유미는 놀이터 아저씨를 보았어요. 예전에 유미가 가지고 놀던 공이 아저씨가 앉아있던 곳으로 굴러갔을 때 공을 잡아서 유미에게 다시 굴려주던 아저씨 얼굴을 꿈속에서 다시 보았어요.
유미는 다음날 놀이터에 가지 못했어요. 아무리 졸라도 엄마가 데려가 주지 않았거든요.
대신에 하루종일 집에서 비디오보고 인형놀이하며 지내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이틀이나 꼬박 집안에서만 지내다 유미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나오게 되었어요.
놀이터 앞을 지날 때 유미는 친구들이 그네를 타고있는 것을 보았어요.
엄마를 막 졸라서 겨우 놀이터에서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유미는 너무 신이 나서 마구 소리를 지르며 놀이터에 뛰어들어갔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없어졌다던 놀이터 아저씨가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는 게 보였어요.
유미는 깜짝 놀랐어요.
엄마도 깜짝 놀랐는지 나를 꼭 안는 거예요.
그리고 내 손을 꽉 잡고 다시 놀이터 밖으로 다시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빨리 집에 가야한데요.
그때 놀이터 한가운데서 아이가 없어졌다며 엉엉 울던 아주머니가 보였어요.
미끄럼틀에서 놀고있는 작은 꼬마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놀고 있었어요.
엄마하고 유미는 그 곳으로 다가갔지요.
엄마는 없어졌다던 아이하고 놀이터 아저씨가 어떻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건지가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엄마가 그 아주머니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묻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자세하게 그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그 날 놀이터 아저씨가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나오다가 그 아주머니의 아이를 보았데요.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모르는 낯선 아저씨 손을 잡고 가드래요
놀이터 아저씨는 항상 그 곳에 놀러오는 아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놀이터에 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얼굴을 모두 빠짐없이 알고있었데요.
그런데 못 보던 남자가 꼬마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잠깐만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었데요. 혹시 놀러온 친척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자꾸 아이스크림 사준다며 꼬마아이 손을 잡고 가던 낯선 남자는 슈퍼가 나오는데도 아이스크림 살 생각은 않고 계속 자꾸만 어디론가 가드래요.
그 사이 아이가 없어진걸 안 아주머니는 놀이터에서 막 울고있었고요.
아이가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하자 낯선 남자는 아이를 안고 막 뛰기 시작하더니 아이를 억지로 차에 태우려고 하드래요.
그래서 놀이터 아저씨가 뛰어가서 그 낯선 남자하고 막 싸웠대요.
애들처럼 서로 때리고 뒹굴고 하다가 놀이터 아저씨는 얼굴에 상처까지 생겼데요.
아이는 옆에 서서 막 울고 어른 둘이 막 길에서 뒤엉켜 싸우니까 그쪽 동네 사람들이 싸움을 말리려고 뛰어나왔나 봐요.
그러자 몰려든 동네 사람들을 보고 그 낯선 남자가 도망가려고 했고, 놀이터 아저씨가 끝까지 도망 못 가게 붙잡아 같이 경찰서로 갔데요.
그래서 아이를 유괴하려던 나쁜 남자는 경찰서에 잡혀가고 아이는 다시 아주머니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데요.
유미는 아주머니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놀이터 아저씨를 보았어요. 그런데 놀이터 아저씨는 변함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하고 우리 엄마하고 얘기하면서 자꾸 힐끔힐끔 돌아보니까 창피했는지 자꾸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유미는 놀이터 아저씨가 만화에 나오는 용감한 영웅처럼 보였어요.
나쁜 아저씨의 손에서 아이를 구해줬으니까요.
그런데 몇 칠 후에 정말로 기쁜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 얘기를 전해들은 동사무소에서 놀이터 아저씨에게 상을 내려주었데요. 바로 집이요.
놀이터 화장실 바로 옆에 있던 작은 창고가 이제부터는 아저씨 집이래요.
그래서 동사무소 아저씨들이 와서 창고 안에 있던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도 해주었어요.
작지만 그래도 멋진 집이 탄생한 거죠.
놀이터 창고에서 살게 해주는 대신 놀이터 아저씨는 매일 아침마다 놀이터와 놀이터 화장실을 청소하기로 했대요.
이젠 정말로 놀이터를 지키는 아저씨가 된 거예요.
아저씨는 아침마다 열심히 청소를 했어요. 이젠 더 이상 추운 바닥에서 쭈그리고 자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으니까요.
놀이터도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 졌어요. 아저씨는 아침뿐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놀이터 청소를 했거든요
깨진 유리 조각이 있으면 우리가 다칠 수도 있데요.
그래서 모래 속도 열심히 청소해 주었어요.
그리고 낮에는 가끔씩 시장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도 하게되었어요.
전에는 보기만 하면 무조건 피하기만 하던 시장 사람들이 아저씨에게 일을 시켜주고 대신에 돈을 주었어요.
이젠 놀이터 아저씨도 가끔씩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봐요.
집이 생기고 일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가봐요.
유미는 놀이터 아저씨가 행복해하는 것 같아 너무 좋아요.
이젠 놀이터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니까요.
06.06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이의 시선은 언제나 그런 쪽으로 바라보니까.. 그래서 이 글이 더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 행복이 영원할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