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는 물끄러미 창 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형형색색에 크기도 가지가지인 여러 우산들이 사이좋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유미의 눈길은 창 밖을 떠나 손목으로 옮겨갔습니다.
"세 시 오십 분...."
유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다가 땅이 꺼질 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유미는 아직 집에 가지 않습니다.
오늘 청소당번을 자청했기 때문에 적어도 네 시 반 까지는 학교에 남아 교실과 복도, 학교 계단을 청소해야 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빗자루를 들고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지만 유미만은 혼자 창가에 동그마니 떨어져 혼자 뭔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유미! 청소 안 해? 너 혼자 다시 할 거야?"
임시 반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임시 반장이 된 애는 여자 1번인데 신경질적이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볼 때마다 여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면 되잖아, 하면."
마지못해 유미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집어들자 임시 반장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걸레를 짜러 개수대로 갔습니다.
"야! 다 했어."
"알았어, 가방 싸고 앉아서 책 봐."
"야, 나 가야 돼. 오늘 학원 가야 된단 말이야."
"그럼 가, 선생님한테 혼나도 난 몰라."
"뭐야, 그러고도 니가 반장이냐?"
두꺼운 안경을 낀 더벅머리 남자애가 임시 반장과 티격태격 하는 사이 유미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청소도구함에 집어넣고 손을 씻었습니다.
"야! 너희들 뭐하는 거야. 청소하라고 했잖아."
임시 부반장이 들어오면서 화를 냈습니다.
"뭐야, 니가 반장이야? 반장도 아니면서 왜 너까지 그래?"
"반장이면 다냐? 아이고 반장 같아야 반장이라고 부르지."
반장과 부반장이 싸우자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들키키 전에 바삐 신발과 가방을 챙겨 학교 현관까지 가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유미는 비를 맞지 않게 웃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길가에는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유미가 늘 건너던 횡단보도에는 누가 그랬는지 잘게 찢어진 신문 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유미는 그것들이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줄도 모르고 걸었습니다.
"♬~♪♩~"
갑자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유미는 급히 꺼내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엄마야. 뭐 하니?
"집에 가."
-여태 학교에 있었어? 왜 이렇게 게으름 피운 거야.
"청소 했단 말이야."
-우산은 갖고 갔어?
"아니."
-너 왜 엄마 말을 안 듣니! 우산 가져가라니까 그 한 마디도 못 들어?
"엄마가 언제 그런 말 했어? 몰라! 끊어!"
유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탁 닫아 주머니에 쑤셔넣었습니다.
그 후로도 벨소리가 몇번 울렸지만 유미는 모르는 척 천천히 아파트까지 걸었습니다.
어느 새 유미의 옷은 쏟아지는 빗물로 흥건히 젖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간신히 집앞까지 오자 이번에는 천둥번개가 꽈르릉 쳤습니다.
유미는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에 들어왔습니다.
뒤로 철컥 문을 잠그고 유미는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손길이 닿지 않은 옷의 차디찬 냉기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컴퓨터를 켰습니다.
-들어오셈
"딸깍딸깍"
유미는 채팅창을 켜고 한 채팅방에 들어갔습니다.
원래는 성인-30대 채널이었지만 유미는 원래 어른들과 채팅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물론 엄마는 유미가 이런 사이트에 접속하는지조차 모르십니다.
한참 채팅을 하고 나자 벌써 바깥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유미는 부엌에 가서 물을 끓였습니다.
엄마가 늦으실 때 유미는 으레 이렇게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웁니다.
라면도 깨끗이 비우고, 유미는 갑자기 으스스한 추위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유미는 얼마 전 엄마가 장만한 전기장판 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유미는 땀까지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유미야, 유미야? 괜찮니?"
...유미는 눈을 반짝 떴습니다.
병실이었습니다.
"엄마....여기 어디?"
"너, 독감 걸렸대. 여기서 당분간 지내야겠다."
병실 한 켠에서는 만화영화가 방영되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미니게임기를 이용해 어떤 오빠가 힘껏 버튼을 누르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집에 갈래....."
"안돼."
"...엄마 여기 자주 올 거야?"
"당연하지. 엄마 휴가 냈어. 니 곁에만 있을 거야."
유미는 얼굴에 함박 웃음을 담았습니다.
"그럼 엄마 회사 안 가?"
"그럼."
"나하고만 있을 거지?"
"응."
"와~너무너무 좋아 엄마! 난 엄마가 젤 좋아!"
유미가 엄마를 꽉 끌어안자 엄마는 당황한 듯 손을 뿌리쳤습니다.
환자들이 모두 이 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얘가 왜 이래?"
엄마는 얼굴이 빨개져서 병실을 나가버렸습니다.
유미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한참 동안 문 쪽을 바라보다가 누워 잠들어 버렸습니다.
다음 날 엄마는 집에 가서 유미가 먹을 죽과 책 몇 권을 가져왔습니다.
유미는 낙서를 하다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스케치북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 미워. 엄마 바보.
-사람들 눈이 나보다 좋아?
-그게 엄마야?
자세히 보니 베개가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엄마는 유미를 살짝 쓰다듬어 준 후 옆에서 뭔가를 써 유미 손에 쥐어주고 다시 병실을 나갔습니다.
다음 날 유미가 깨자 엄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병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유미는 분명히 어제 한 낙서를 보고 화가 나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득 손에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손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땀에 젖은 편지가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유미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유미
엄마에게 화가 많이 났구나.
엄마는 그동안 사람들 이목만 신경쓰며 살아왔는데
우리 유미 덕분에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어.
그 동안 널 내버려두고 엄마 일만 생각했던 엄말 용서해 주겠니?
엄마는 유미를 사랑한단다.
2003년 7월 25일 월요일 비가 내린다. 엄마 마음에도 비가 내린다.
유미는 생긋 웃으며 편지를 고이 접어 침대 머리맡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새 편지지를 집어 볼펜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ㅁ+ = 주제 : 지난 번에 이어 역시 오늘도 산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