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아파트는 도심지 중의 도심지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입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무를 보고, 가정을 꾸리고, 학원도 차려 운영합니다.
딱딱한 벽으로 막힌 집이지만 매주 한 번씩 갖는 이웃사랑모임을 통해 이웃간에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2년 전부터 이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엄마 말씀으로는 비록 집값은 비싸도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 수 있다면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학교에 다닙니다.
올 봄부터 5학년 2반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지요.
작년 4학년 때는 공부에 소홀해서 시험에서 두 개를 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4학년 전체 1등의 성적으로 상을 탔습니다.
그런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애가 나를 제치고 전교 부회장과 전체 수석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여자애입니다.
이제껏 남녀차별을 부르짖으며 공부를 통해 여자애들을 확실히 꺾어놓은 나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 비인간! 너 이제 그 머리 쓸모없어졌냐?"
"뭐야, 여자한테까지 지다니. 비인간, 별명 내놔라."
"이제 그 여자애가 비인간이다. 킥킥킥."
"그것 봐. 여자 차별대우하더니 꼴 좋다."
원래 내 별명은 비인간입니다.
인간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는 까닭에 붙여진 별명이죠.
난 그 별명을 썩 싫어하진 않았습니다.
내 머리가 좋다는 증거니까요.
그런데 이제 정말 별명도 내놔야겠습니다.
그 여자애한테요.
"아, 정말? 그게 그렇게 재밌대? 야, 그럼 우리 내일 보러 갈까? 그 때 사탕도 좀 구경하자. 수예부 언니들이 그러는데 사탕 이쁜 거 많이 나왔대. 참, 나 그리고 방학주면 제주도 놀러갈 건데 같이 갈 사람?"
도무지 저 애가 뭐가 특별한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 여자애들처럼 쇼핑을 좋아하고 5,6학년 누나들을 많이 알고, 특별한 거라면 남들보다 조금 낭비벽이 심하다는 것뿐입니다.
또 매일 후줄근한 후드 티나 청바지를 입고 다닙니다.
저 애는 100원짜리 싸구려에서부터 몇만원어치 액세서리까지 갖고 있지 않은 게 없습니다.
오죽하면 애들이 동네 시장이라고 부르면서 천 원이나 이천 원에 그 애가 갖고 있는 물건들을 원래 값보다 더 싸게 사갈까요.
"동네 시장! 이거 얼마야?"
"그거 3천 원이야. 그게 원래 얼만지 알아? 자그마치 3만원이야. 부산 ○○에서 산 건데 이쁘지? 사진이나 그림 넣어도 되겠더라. 너 요즘 스티커사진 모은다면서. 그 위에 살짝 붙여놔."
"알았어, 여깄어. 고마워."
"야! 이거 얼마냐?"
"그 플라모델? 야, 그거 300원밖에 안 해. 너 가져라. 돈 저기다 두고 가져가."
"고맙다! 동네 시장."
남자애들까지 그 애한테 물건을 사지만 난 한번도 사본 적이 없습니다.
딴 애들은 연립이나 저층 아파트에 사는 촌스러운 애들이지만 난 천도 아파트에 사는 귀족 뺨치는 계급의 사람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저 애는 도무지 어디 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둑어둑할 때까지 도서실에 있다가 집에 간다곤 하는데. 어디로 가는진 아무도 모른답니다.
분명 변두리에서 살겠죠. 창피해서 그러는 티가 납니다.
오늘은 우리 동 이웃사랑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열리는 곳은 50평짜리를 두 개 터서 쓴다는 천도건설 회장님네 집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대여섯 달 전에 이사온 집인데 한 번도 못 가봤기 때문에 내 기대는 더욱 컸습니다.
"어머나, 정말 크네."
100평은 바깥에서부터 달랐습니다.
은은한 음악도 들리고, 향도 조금 퍼진 것 같고.
"여기 누가 살어?"
"네 또래 애도 산다더라. 방 좀 구경해. 공불 잘 한대."
설마.
나보다 공부잘 하는 남자앤 없을 겁니다.
아니 없습니다.
그 변두리 촌닭 여자애가 아니고서는요.
"아,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자녀를 데리고 오신 분들께서는 저쪽으로 데려가십시오. 우리 선휘 방입니다."
애들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이란 데도 무지하게 넓었는데 방 주인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푸른색 커튼에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그리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만화책들.
벽에 주렁주렁 걸린 액세서리들.
"아빠! 누가 내 방에 있어요?"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변두리 촌닭이 방 주인이라니오.
"야, 너 뭐야? 여기 왜 왔어?"
학교에서 들을 수 없는 괄괄한 목소리.
"너 여기 살어?"
"그래, 우리 아빠가 여기 지었잖아. 나 지난 번에 전학왔는데, 너 몰랐냐?
어쩐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럼 저 앤 이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한선휘?
하지만..
학교에선 완전 시장 장사꾼, 변두리 촌닭처럼 행동했는데....
그리고 여기선 왈가닥.
"어쨌든. 여기서 만나니까 반갑다야. 앉아! 코코아 줄게."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가는 그앨 보면서 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저 애의 진짜 모습은 뭘까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