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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생은 바로 지하철에서 만난 정민이었다. 진은 깜짝놀랐다.
'서..설마..'
이게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만나기만 해도 좋을 사람을 매일같이 보게 되다니... 진은 황홀했다.
"오늘부터 함께 지낼 친구야. 이름은 신정민. 소개해봐라."
"난, 신정민이라고 해. 여기 사정 잘 모르니까 잘 좀 부탁한다."
어제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당당하고 씩씩한 목소리였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진은 그마저도 좋았다.
청소시간이었다. 정민도 진을 본 모양이었다. 갑자기 정민은 청소하는 진에게로 다가왔다.
"학생..이었어요?"
"아, 네.. 정민씨도 그랬네요.."
"트고 싶지 않아도, 말 터야겠네.."
"으응.."
혹시 모른척 지나칠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진은 너무 좋았다. 너무 행복했다.
방과 후, 진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하늘을 쳐다보면서 걸었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꽝'하고 부딪힌 것 같은데 너무 아파서 간신히 눈을 뜨고 보았다. 또 정민이었다. 진은 다시 만난게 좋았지만 민망했다. 하필이면..
"야, 또만났다."
"어? 응."
"나, 서울은 처음이야. 안바쁘면 구경좀 시켜줄래?"
데이트 신청? 원래 정민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진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은 발레학원을 가야했지만 오늘만 가지 않기로 했다. 아니, 내일도 가지 못한다 해도 정민때문에 가지 못하는 거라면 안 갈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좋아. 어디부터 갈까?"
발레학원에서는 초비상상태였다. 발레대회가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출전선수가 연습에 나오지를 않는것이다. 어디갔는지 연락도 되지 않았다. 발레학원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집에 전화하고 핸드폰에 연락하고 난리가 났는데도 진은 유유히 가이드 일을 즐기고 있는 터였다.
"여기가 남산타워라는 곳이야. 들어보긴 했지?"
"응. 진짜 높구나."
"등산하는 거 아니면 올라가는 건 쉬워.. 리프트 타고 가볼래?"
"아니, 다른데도 가보자.."
남산타워를 처음으로 해서 신당동떡볶이촌, 이태원거리, 명동거리 등 발바닥이 아프도록 진과 정민은 돌아다녔다. 그런데도 서로 싱글벙글이었다. 그러다가 진은 문득 핸드폰을 꺼논 것이 생각나서 얼른 켰다. 아닌게 아니라 부재중전화가 무려 7통이었다. 진의 엄마와 발레학원 선생님이었다.
"아.. 어떡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리프트를 타려 했을때도, 떡볶이를 먹을때도, 명동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옷구경을 할때도 문득문득 발레는 진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떻게 이루어진 운명같은 데이튼데..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진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상대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일시적으로 전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야! 너 지금 어디야.. 너 지금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발레 대회가 며칠이나 남았다고, 응. 지금 게으름을 피는거야? 너 가뜩이나 연습도 제대로 안했으면서 남들보다 뒤쳐지면 어떡할래? 응?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 줄 알기나 해? 너 지금 어디야?"
"조금 먼 곳에 있는데요.."
오늘은 정말 학원에 가기가 싫어서 이런 금쪽같은 시간을 그런 데에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30분내로 당장 와. 안오면 너는 대회 출전 못해. 자세가 안 되있어. 아주. 얼른와"
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왜그래? 무슨 일있어?"
한숨쉬는 진을 보고 정민은 물었다.
"아..아니. 무슨 일은.. 서울이 넓은 곳인데.. 이정도로 서울구경 마쳐도 되겠냐? 언제 또 갈까?"
"나중에.. 이제 시험준비해야지.."
"너.. 공부 잘해?"
마음은 초조하고 다급했지만 유유한척 진은 천천히 걸었다.
"잘하긴..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신촌까지 왔을 때는 5분 남은 상태였다. 여기서 뛰면 4분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은 정민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저기.. 나 지금 좀 가봐야 되거든. 오늘 즐거웠어.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
"데려다줄게. 어둑어둑해지는데.."
그 말에 또 못 이겨서 진은 응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조금만 늦으면 짤릴 수도 있는 판국에..
"나 늦었거든.. 그럼 빨리 뛰자."
고수가 나오는 박카스 선전처럼 둘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유독히 달리기를 잘하는 진이어서 정민에게 뒤쳐지지 않았다. 학원앞에 도달하자 2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만 가봐, 고마웠어.."
"응. 내일보자."
정민이 돌아서자 진은 허겁지겁 학원을 향해 올라갔다. 정민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뭐 때문에 저렇게 허둥대는 것일까. 혹시 자기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가. 정민은 진을 따라 학원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라는 걸 알지만 호기심은 나랏님도 말리지 못하는 것. 정민은 원장과 진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너 지금, 어디서 오는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문제가 아니고 대체 어디서 오는거냐고?"
밖에서 듣는 정민도 뭔가 심각한 문제라고 파악했다.
"대회가 3일남았어. 너 지금도 자세가 불편해보이고 안정감을 주질 않아. 이레서 발레리나 될 수 있겠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면 너 이 꿈 접어. 하루 3시간 자고 연습해도 될까말까한데 금쪽같은 하루를 허비해버려? 니가 지금 그럴수 있어?"
"....."
"왜 말이 없어? 핸드폰은 왜 꺼놔? 너 남자친구 생겼어? 그래서 지금 게을러진거야?"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정민과 함께 있었던 자리에서의 씩씩함과 당당함이 모두 무너져내리는듯했다.
"잘못했어요.. 저 이번에 해야되는데.. 정말 중요한 일이있어서 그랬습니다. 오늘 밤에 집에 안들어갈게요. 못한 거 보충하겠습니다. 원장님.."
"얼른 발레복 갈아입고 나와."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가는 진을 보면서 정민은 생각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바쁘면 바쁘다고 말할 것이지 도대체 왜 이렇게 혼나면서까지 자기의 가이드가 되어준 것일까. 정민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다음날, 진은 지각을했다.
끝나고 나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제와 달리 진의 기분이 너무 안좋아 보여서 하루종일 정민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민은 빗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같이 쓸기 시작했다.
"괜찮아. 나 혼자 할게.."
"너 바쁜거 알아. 빨리 가봐.."
정민은 무심코 그렇게 말해버렸다. 진은 정민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너...."
"미안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네가 왜그렇게 허둥대는지 궁금해서.. 정말 미안해.."
"내가 발레한다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너만 알아야 돼.. 알겠지?"
의외로 담담했다. 뭐라고 성질을 부릴 것 같았는데 진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볼게. 어제 그렇게 바쁘면서 왜 가이드 해줬어? 네가 바쁘다고 했으면 다음에 해도 됬을텐데.. 왜 해줬던거야?"
또다시 진은 정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by.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