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라는 건 뭘까? 키가 큰다는 것과 같은 뜻일까, 아니면 시쳇말로 업그레이드와 관련된 말일까. 초등학교 3학년 창식이는 오늘 읽은 과학 동화에 나온 '진화'라는 말이 알쏭달쏭 알 듯 모를 듯 머릿속을 맴도는 게 어지럽게 느껴졌다.
'에구 멀미 난다.'
사람도 진화를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데, 몸집이 활동하는 데에 편리하게 바뀌면 진화라고 하는 건가? 아니야, 그건 개선이라고 하는 걸꺼야. 진화는 좀더 깊은 뜻이 있는 말이겠지. 칙칙 보글보글 양치질을 하면서도 창식이는 갸웃갸웃 생각을 이어갔다.
'사람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말이야. 지구에는 목이 짧은 기린이 살고 있었대. 그런데 빙하기와 간빙기가 번갈아 오면서 먹을 것이 점점 줄어들자 어떤 기린은 환경에 맞추어 목이 길어졌다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시던 엄마께서 진화에 대해 묻는 창식이에게 대답을 하셨다.
'환경에 맞추어 변화해가는 게 어떻게 진화야? 진화는 뭔가 발전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창식이는 뾰로통 볼이 부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자그마한 몸집을 이불 속에 폭 파묻고 예상치 못한 깊은 잠에 빠졌다.
꿈 속에서.
창식이는 목이 짧은 기린이 되어 있었다. 이미 자신의 키가 닿는 곳 어디에서도 먹을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혹독한 환경 변화는 뭇 짐승들의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나도 배가 고파. 나에게도 먹을 걸 좀 나눠줘.'
창식이는 목이 긴 기린에게 소리쳤다. 외치는 소리는 하늘까지 닿을 법했지만 귀담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높은 나뭇가지에도 먹을 것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해. 너희가 불안하고 너희가 배고픈 만큼 목이 짧은 우리도 그래. 그런데, 왜 우리를 도와주려 하지 않지?'
'너흰 도태된 존재야. 아무도 너희를 도우려 하지 않아. 언젠가 너희들은 죽어가겠지. 그게 바로 오늘일 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건 하늘의 뜻이야. 우리가 목이 길어져 너희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것이고, 너희는 버림받았다는 뜻이지.'
냉정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눈길조차 볼 수 없이 목소리만 전해졌다.
'말도 안돼. 그게 어떻게 하늘의 뜻이야. 어떻게 우리는 도태이고 너희는 진화라는 거야? '
꿈 속의 목 짧은 창식이는 답답한 마음에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으아아앙. 싫어. 이런 건 진화가 아니야.'
소스라쳐 깨어난 창식이는 꿈속에서처럼 서럽게 울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진화는 정신의 성숙이 함께 할 때 붙일 수 있는 말이라고 창식이는 결론내렸다. 나만이 아닌 다른 것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진화라고 생각하였다.
'난 절대로 목이 긴 기린처럼 행동하진 않을 거야. 그들이 더불어 함께 생존해나갔다면 지금도 목이 짧은 기린을 볼 수 있을 텐데.'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창식이는 중얼거렸다. 토스트를 입에 하나 가득 물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 창식이에게 엄마께서 소리치셨다.
'얘, 왜 이렇게 빨리 나가? 아직 7시 30분밖에 안됐어. 매일 8시에 나가던 애가 웬일이래?'
'수진이네 집에 가려구요. 제가 어제 그 애 키가 작다고 놀렸거든요. 울면서 집에 갔는데 미안하잖아요. 학교에 같이 가면서 사과해야죠. 목이 짧은 기린 이야기도 들려주구요.'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서는 창식이의 입 가에 '진화'가 살짝 걸려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