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5층 주방용품 매장에 반질하게 닦인 주전자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은회색에 태극 무늬를 변형한 자잘한 무늬까지 두른 꽤나 멋스러운 제품. 게다가 물이 끓으면 기분 좋은 노래까지 부른다는 똑 소리나는 주전자.
"쫌 비싼게 흠이지만, 이쁘네요. 이거 하나 주세요."
드디어 주전자로서의 제몫을 하려고 팔려나간다는 생각에 전시된 주전자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설마 전시되어 있는 걸 주려는 건 아니죠? 새 걸로 주세요."
"방금 내 놓은 건데, 그러세요. 새 걸로 드릴게요."
불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창고에 박혀 있던 쌍둥이 주전자가 팔려나갔다. 조금 속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손님과 그 다른 손님과 그그 다른 손님도 전시된 주전자는 구경만 할 뿐 사가는 건 언제나 창고 속의 '새' 주전자였다.
몇 주 후, 전시되어 있던 주전자도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 전시 물품 파격 세일에서 제법 싼 가격에 자신을 낙찰받은 주인. 뭐가 어떻든 자신도 전시물이 아니라 주전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주전자는 행복했다.
주인집에서. 깔끔함이 묻어나는 주방으로 간 주전자는 세제로 잔뜩 목욕을 했다. 뽀드득 뽀드득, 백화점에서 쌓인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주전자는 개운해졌다.
"우와, 새 주전자야? 무지 이쁘게 생겼다. 여기에 물 끓이면 꽃 향기가 날 것 같아."
주인집 꼬마가 말했다.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던 주인 아저씨는
"노래도 부른다네.. 이야, 주전자가 대단한데? 여보, 물 한 번 끓여 봅시다. 주전자 노래 한 번 들어보게."
라고 말씀하셨다. 주전자 표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던 주인 아주머니는 박꽃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주전자는 서서히 서서히 물을 끓였다. 나쁜 세균은 없애고, 찬 것은 뜨겁게 하고, 1분 5분 ... 10분... 바글바글 바글바글.
"뭐야, 왜 노래하지 않고 바글거리기만 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리던 주인집 꼬마가 말했다.
'이봐, 그게 아냐.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거야. 뚜껑만 꼭 닫아봐, 나도 이쁜 노래 부를 수 있어.'
주전자는 물기를 닦던 행주에 신경을 쓰느라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전자의 노랫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가족은 뚜껑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왠지 싸게 팔더라니.. 싼 게 그렇죠 뭐."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말했다.
"흠흠, 뭐 물만 잘 끓으면 됐지. 차 한 잔 합시다."
주인 아저씨는 설명서를 읽으며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물이 바글바글 끓기는 했지만 주전자는 자신이 새 주전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노래를 부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차를 끓이고 남은 물이 싸늘하게 식어갈 때까지 오래 부끄러웠다. 주인 아주머니의 실수로 뚜껑이 잘 못 닫힌 것 뿐인데, 사람들은 그런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한 동안 새 주전자는 주방 한 구석에서 외면받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었는데, 주전자의 입장은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어머 주전자가 앙증맞게도 생겼네. 우리 이 주전자가 끓인 물로 차 한 잔 마셔봐요."
늦은 오후에 놀러온 이웃 아주머니가 말했다.
"노래를 못 하는 주전자예요. 태어날 때부터 이상했나봐요. "
주인 아주머니가 속상해하며 말했다.
" 뭐 어때요. 주전자는 물만 끓이면 되지요. "
그리고 주전자는 다시 불 위에 올랐다. 1분 2분 3분... 바글바글바글...
'띠리리리 리리리 띠리리리리리...'
'어라? 주전자가 노래를 하네요. "
"그러게요. 한 동안 안 썼더니.. 그새 철들었나 봐요."
그게 아닌데. 이번에는 뚜껑을 제대로 닫았을 뿐인데, 뜬금없이 철 들게 된 주전자. 조금 씁쓸했다.
그날 저녁. 철 든 주전자는 가족들의 찻물을 끓이게 되었다.
'띠리리리 리리리 띠리리 리리리... '
청아한 노랫소리가 들리자 가족들이 기뻐했다.
언젠가 이 가족들은 주전자가 처음에 노래부르지 않은 것이 뚜껑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 백화점 전시 품목으로서 조금은 속이 상해있었을 주전자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될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주전자에게 저지른 잘못과 유사한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선입견 때문에 혹은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나약하고 여린 것에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일상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일까.
노래하는 주전자. 사실, 주전자는 굳이 노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선뜻 받아들이게 될까. 오늘은 달이 유난히 밝았고, 그래서 주방 창 밑에서 달바라기를 하던 주전자는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은 은회색에 고운 띠를 두르고 있지만 그리고 노래도 부를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이 차가운 물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을 한다는 것 뿐인데. 부수적인 것이 자신의 주전자로서의 가치마저 평가하게 된 현실이 주전자는 못내 쓸쓸했다. 그리고 낡고 좀 찌그러졌다는 이유로 분리수거된 예전 주전자의 뒷모습이 안타까웠다.
노래하는 주전자. 하지만 아주머니의 실수로 노래부르지 않았던 단 한 번의 사건 때문에 이제 생각하는 주전자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