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잔풀이 많이도 자랐구나."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는 길,잔풀을 '톡톡' 끊어내시며 이명숙 여사는 흐뭇함이 잔뜩 묻어나는 미소를 머금습니다. 햇빛 쐬고 비 맞으면 쑥쑥 자라는 잔풀들이 여간 귀엽지 않다는데, 종학이가 보기에는 귀엽다기 보다는 귀찮습니다.
"에이, 할머니, 귀엽다면서 왜 뜯으세요? 할머니도 실은 귀찮은거죠?"
"욘석아, 귀여우니까 할아버지께 보여드려야지. 요렇게 잔풀들도 잘 자라고 있다고 말이야. 이 땅이 아직은 생명에게 너그럽다고..."
딱 한 웅큼의 잔풀을 뜯고 나니 할아버지 산소입니다. 참 조용해보디는 모습, 종학이는 실재 할아버지도 저 무덤처럼 말이 없고, 조용한 분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저 왔어요. 한 동안은 자주 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종학이 녀석이 한 달 정도는 이 곳에서 살 것 같으니, 이 녀석 앞세우고 종종 올라올게요."
"할어버지, 저예요. 손자 종학이. 길가에 잡풀 만큼이나 쑥쑥 잘 자랐죠? 지난 번에 다녀간 뒤에 5 cm나 더 컸어요. 요즘은 숨만 쉬어도 키가 자라는 것 같아요. 기쁘시죠?"
잔풀을 단 위에 놓고, 할머니는 오래 오래 미소만 짓고 계십니다. 그게 못내 마음이 아픈 어린 손자 종학이입니다.
할어버지는, 아직은 너무 어린 종학이의 할아버지는 절름발이였다고 합니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곤 하는 다리 병신. 그게 할아버지의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리는 호칭이었더랍니다.
동네에서 인물 곱기로 소문난 이명숙 여사는 절름발이 철승이가 두 집 건너에 산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참 무던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놀림에도 절름발이 철승이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거든요.
"할머니, 해지겠어요. 이제 내려가죠?"
종학이의 재촉에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듯 이명숙 여사는 언덕을 내려갑니다. 지는 햇살을 등지고 걷는 할머니의 어깨가 쓸쓸합니다. 종학이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큰소리로 말합니다.
"할머니, 저 무슨 일 해요? 봉사활동 시간 주실거죠? 한 400시간 주시면 안 되요? 그 정도는 있을텐데. 네?"
"잠 안 자고 일만 하려고? 그러면 내가 생각해보마. 지붕부터 손 볼래? 비가 샐지도 모르거든. 그거 끝나면 놀이터를 만들자꾸나."
"아, 할머니, 그걸 제가 어덯게 해요? 그냥 청소시켜주세요, 네?"
"일 한다며? 청소가 일이냐?"
할머니가 조금은 기운이 나신 듯합니다. 손자 재롱도 쓸만하다고 종학이는 생각합니다.
그 날 저녁, 종학이는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되는 꿈을 꿉니다. 놀리는 아이들에게 마구 화 내고, 때로는 해코지도 하고, 꼬장도 부리는 성질 나쁜 철승이가 되는 꿈 말입니다. 비록 꿈이지만 속이 후련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사셨다면 할머니의 마음이 저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새벽 꿈길에서도 종학이는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