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록 별조각인 자네 말이야. .. 이봐 친구. 매 생애마다 비록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이렇게 만나고 있는데 한 번쯤은 자네가 먼저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네. --;"
고운 달이 창을 통해 쏟아지는 작지만 따스한 공간.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다.
"맨 처음. 그러니까 지상의 나이로는 셀 수 없는 그 아주 오랜 세월 전에 아무 것도 아닌 자네와 아무 것도 아닌 나는 하나였다네.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고, 색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자네와 나는 그냥 그렇게 하나였지. "
"그런게 어떻게 가능하죠? 지금도 저는 저이고, 할머니는 할머니인데요?"
고운 머리결을 쓸어넘기며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게 다 처음에는 그랬다네. 좀 더 간절한 마음을 갖는다면 자네도 알게 되지 않을까? 자네도 하나였던 것의 일부니까 말이야. ^^*"
"하핫, 그런가요?"
"처음에 하나였던 우리에게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 같은게 떨어졌어. 어디서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왔는지 알 수는 없어. 그냥 우연이라고 해야하겠지. 그 작은 알갱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우리 사이에 균열을 일으켰어. 너무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어. 수천만 개로 갈라진 우리들은 멀리 흩어져갔고, 가장 가까이 붙어있었던 우리는 '단절'과 '홀로됨'을 처음 경험했지. "
"우리는 아주 컸나 봐요. 수천 만개로 갈라지다니요."
"크다 작다를 얘기할 수 없는 상태였어. 아직은 정말 기억 못하는군. 그리고 수천만 개라는 것도 그냥 셀 수 없이 많단 소리지."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매 생애 주어진 시간마다 끊임없이 노력했지. 하지만 이미 다른 존재가 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었어. 어느 생애 어느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버리게 되었어. 그리고 순간에 충실하고 감정에 따르기로 했지. 그 때 자네가 택한 것이 방랑이야. 안정을 추구하던 나와 달리 자네는 변화를 추구하는 마인드였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항상 언젠가는 같이 있었어.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으니까."
"신기한 일이로군요.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면 그게 지켜지나요?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은 드물잖아요."
"진심일 경우 그건 가능하지. 진심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니까."
할머니의 회색 눈동자. 웬지 이제는 친근감이 들었다. 기억이의 마음 속에 까닭모를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생애에서였어."
할머니의 말이 나직나직 이어졌다.
"자네가 기약없이 길을 떠났고, 그 때 생각했어.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는 상태에서 만나는 일은 그 생애가 끝이 아닐까 하고., 그게 정말이더군. 수천 생애를 돌고 도는 동안 자네가 나를 알아보는 일은 없었어. 부모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낡은 가방의 모습으로 우리는 자주 함께였지만 자네는 날 몰라보았지."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가 이 우주를 돌고 돌고 하고 있다구요? 믿을 수 없어요."
"믿을 필요는 없어. 눈을 뜬 자에게만 보이는 진리니까. 자네가 이번 생애, 별조각으로서의 생애에서 자네가 풀어야 할 과제를 충실히 푼다면 어쩌면 '우리'가 보일 지도 모르지. 물론 아직은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별조각으로서의 저라... 저는 다시 별님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무한 우주 속에서 영원하고 싶답니다."
"그걸 바란다면 이루어질거야. 단,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니겠지. "
"할머니는 무얼 바라시나요? 이번 생애에서요. "
"이번 생애에서 나는 추억을 더듬는 일을 하고 있다네. "
"그럼, 저는 할머니의 오랜 추억인가요?"
"음, 곧 별님이 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떠날 초록색 추억이지."
할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울렸다. 기억이는 자신도 모르는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꿈 속에서 수억 겁 세월을 거슬러 무한 우주 자체인 자신을 경험했다.
'모래 알갱이 같은 게 우리에게 떨어진 이유가 뭐였을까? 그걸 찾아봐야 하겠어. 그 해답이 어쪄면 별조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번 생애 내 운명과 맞닿아 있을 지도 모르잖아. '
꿈 속에서 기억이는 오랜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흐릿하게나마 길을 떠날 방향을 찾은 때문이었다. 내일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떠나는 길에는 자신을 먼저 알아봐 준 할머니에게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할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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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을유년입니다.
자유와 평등
배려와 감사
풍요와 공정한 분배
도전과 성취
... 가 조화를 이루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