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말이지, 그게 참 요물이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는 아 참 인생은, 거, 선택이래나 뭐래나?"
앞니가 흔들린다는, 그래서 이제는 갈 때가 다 되었다고 노상 말씀하시는 정씨 할아버지는 오늘도 종학이를 붙잡고 신세한탄입니다. 사실, 틀니 없이 일흔을 넘기신 '오색 복지관'의 몇 안 되는 노인분 중 한 분이면서, 몇 해째 계속 살짝살짝 흔들리는 앞니를 붙잡고 저승길 동무라고 웃으시는 모습에 종학이는 못내 안타깝습니다. 그레도 맞장구를 쳐 드리면 틀림없이 6`25사변 얘기까지 좌악 늘어놓으실게 뻔하니 그만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할아버지, 사무장님께서 바둑판 닦으시던데요? 내기 바둑 두셔야지요."
"어허, 그래. 아 그 양반 바둑도 못 두면서 매일 사람을 귀찮게 굴고 그랴."
말씀은 이러시지만 바지를 털며 일어서시는 폼이 제법 신명이 나셨습니다.
'오색 복지관'의 일명 '사이비 봉사자' 종학이는 방학을 맞아 복지관으로 임시 이사를 왔습니다. 봉사 활동 시간을 5배는 넘게 채웠지만 복지관에 오는 발길을 끊지 않습니다.
"에헤이, 사이비 종학! 이번 방학에는 아예 살러 왔다면서?"
허드렛일을 도와주신다는 무진이 아빠는 한 몇 년 안면을 익힌 종학이를 친구 대하듯 하십니다.
"예. 둥지를 틀어버릴까요?"
너스레를 떨며 받아넘기자
"자네같은 고삐리는 필요없어. 기왕 올거면 공부 할 것 다 하고, 복지사 자격증이라도 따 가지고 와. 의욕이나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아. "
하고, 여전히 현실적인 말씀이십니다.
"하하, 무진이는 잘 있죠?"
"덕분에. 고 녀석 자네 왔다는 소리에 벌써부터 잔뜩 들떴더군. 하지만 이번에도 무진이 녀석 데리고 산다람쥐 잡는다고 설치고 다니면 혼날 줄 알아. 봉사하러 왔다는 사람이 맨날 놀기만 하면 어쩌나?"
무진이 아빠의 걱정에 멋쩍은 미소로 답하고 종학이는 관장님을 찾아나섰습니다.
50대의 너무 젊은 종학이의 할머니, '이명숙 여사'가 이 작고 낡고 보잘 것 없지만 배곯거나 추위타는 사람 없는 오색복지관 관장님이었습니다. 차분히 빗어넘긴 머리카락이 슬픈 종학이의 할머니.
"관장님, 저 온 것 아시죠? 그런데 왜 아는 척도 안 하세요?"
잡풀을 뽑고 있던 관장님은 투박한 면 장갑을 벗으며 굽은 허리를 펴셨습니다.
"욘석아, 오지 말라는데도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 네가 집에 있는 시간보다 여기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고 네 에미가 여간 걱정이 아니야. "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큰 손자를 보는 낙에 하루하루 더 젊어진다고 말씀하시고 다닌다는 것을 종학이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산소에는 다녀왔냐?"
종학이의 할아버지 말씀이십니다.
"할머니와 같이 가려구요. 그래서 찾아다녔어요. 기다릴테니까 준비하고 나오세요."
할아버지의 산소는 오색복지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결코 혼자 찾아가시지 않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어도 언덕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차마 혼자 갈 순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창 비가 쏟아지던 날 오후 종학이가 할머니께 까닭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슬프게 가슴에 남는 건 아직도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난 말이다, 네 할아버지를 오래 기억해야 할 사람이란다. 아니, 어쩌면 내 기억보다 더 오래 기억될 자격이 있는 분이시지. 네 할아버지 말이야. 그런데 나 혼자 산소에 오르려 하다보면 참 나도 빨리 저 세상으로 가고 싶어져서 어찌할 수가 없게 되는구나. 그래서 차마 혼자 산소에 오르지 못하네. .... 난 기억해야 하는 사림이니까 말이다. "
빗줄기만큼이나 쓸쓸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 건 정말, 틀림없이, 자신이 아직 어리기 때문일 거라고 종학이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