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변함없이 불만에 찬 목소리.
"물론 아니지.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하신 아빠가 하셔도 되고, 올해 여든 셋에 통증으로 허리에 침 맞고 돌아오신 할머니께서 하셔도 되고, 모레부터 기말고사인 고3 형이 해도 되고,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간을 맞춰야 하는 엄마가 해도 되는 일이지. "
<아, 고단수다. 절대 화 내는 법 없이 사람 고문하는 기술은 엄마가 다니는 요가 학원에서 가르쳐주는게 틀림없다. >
"아, 그래, 알았어. 3시에 학교에서 돌아와 지금까지 바닥에 배 깔고 누워 잡지 뒤적이던, 모레 기말고사라도 공부 한 자 안 하는 중 2 둘째가 다녀올게."
툴툴거리며 일어선 진영이의 뒤꼭지에 대고 화 안 내는 엄마께서 덧붙이신다.
"'금'표로 사와야 해. '은'표로 사오면 반찬이 썩어.^^*"
<둘째를 바보로 아시는 거다. 눈 씻고 찾아봐도 '은'표 간장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수퍼마켓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금'표 간장 무더기들. 홧김에 100개 정도 사들고 가고 싶지만 팔뚝 힘이 바닥을 치는지라 참기로 한다.>
엄마께 '금'표 간장 한 병을 떠 안기고 방으로 돌아와 명색이 학생인지라 책을 펼쳐보았다. '영어'다. 영어 공부는 완전 사기다. (문단이 바뀌면 역접의 접속사가 나오고, 그 때부터 문제의 핵심이 나오는 거라는 학원쎔의 말씀. 해석 한 줄을 못 해도 문제를 풀 수 있다는거. 완전 사기 맞다.)
"둘째! 밥 드세요."
<엄마가 둘째라고 안 부르셔도 알거든요. 내가 이 집안 둘째라는 거.>
'금'표 간장으로 간을 맞춘 된장찌개.. 하아. 절대로 '금' 맛은 안 난다. 그래서 맛. 있. 다. *^^*
다음 날 아침. 틀림없이 일요일인데, 6시 조금 넘자 엄마께서 들어오신다 절대로 화 안 내는 엄마께서 이불을 확 걷으며 심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진영아,..."
<으윽, 이름을 부르시는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건 버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눈 뜨고 일어나야 한다.>
"아, 네, 일어났어요."
이어지는 엄마의 심상찮게 환한 미소.
"아빠랑 할머니 모시고 등산갈거야. 형 점심 챙겨주는 거 잊으면 안 된다."
<아,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지만 명색이 나도 내일 시험이다.>
"아, 엄마. 허리 아프신 할머니 모시고 어디를 가신다는 거예요? 그냥 집에서 쉬시죠?"
한 번 투덜대 본다.
"진영아~~~."
<아, 또 이름 부르신다. 조금 더 까불면 틀림없이 내일쯤 윗집 아라네에 놀러가신다고 하실거다. 즉, 그 날은 하루 종일 집을 비우신다는거고, 온갖 집안 일은 내 차지가 된다는 의미가 된다.>
"으, 형 점심만 챙기면 되는 거죠?"
"그럼. 역시 이쁜 우리 둘째. 기분 내키면 네 공부도 해."
화를 저~얼~대로 안 내시고,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엄마와 함께 산 지 어언 15년. 이제 진영이도 알 만큼은 안다. 엄마께 반항해봤자 남는 건 피곤함 뿐이라는 거. 그냥, 하시는 말씀 잘 들으면 일생이 편안하다는거. 무리한 부탁 겉은 건 안 하시니 얼마나 다행이냐. 진영이한텐 절대 전교 1등하라는 말씀은 안 하시는 거다. 감사한 일 아닌가.
그런데 형의 점심. 이거 만만하지 않다.
"형, 오늘 점심 내가 챙겨야 해. 뭐 먹고 싶어."
열공 중이던 화 절대로 안 내는 우리 형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한다.
"토마토 하나, 각 얼음 6개, 설탕 두 스푼 넣고, 갈아. 토스트는 딱 1분 20초만 구워, 2조각. 계란 후라이는 완숙으로 하고, 딸기쨈은 안 먹으니까 반드시 포도쨈으로 두 스푼을 접시에 준비해 줘. 아, 오렌지는 반달 모양으로 8등분을 해서 흰 접시에 담아 내오고, 냅킨은 체크 무늬 말고, 꽃무늬로 따로 준비해."
<보라. 정말 안 쉽다. 그래도 형하고도 15년 같이 살았다. 이제는 능숙하게 까탈스러운 형의 입에서 불만이 나오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거다.>
오후 3시쯤 되자 화 안 내시는 엄마와 엄마보다 더 화 안 내시는 아빠와 일생을 화를 한 번도 내신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는 할머니께서 돌아오셨다.
"호호, 둘째야, 어쩌니. 요 앞 수퍼에 휴대폰을 놓고 왔지 뭐니. "
"그래서요? 꼭 제가 가야 해요?"
아, 괜히 툴툴댔다.
"물론 아니지. 아침 일찍 등산에 나서서 5시간 30분을 등반하고 돌아온 나이 많고 연약한 엄마, 할머니, 아빠 중 한 분이 다녀와도 되고, 시험 시간이 앞으로 18시밖에 남지 않은 고3 형이 다녀와도 돼."
<아, 네. 저도 시험이 18시간밖에 안 남았지만 다녀오죠.>
지금까지 15년 살았다. 이제 나도 화 저얼대로 안 내는 부류에 들어가고 싶다. ㅜㅜ. 엄마, 셋째 하나 만들어줘. 그럼 나도 저얼대로 화 안 내고 툴툴대지 않는'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내일 꼭 데려다 놔야해 응?
peace and happy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