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발을 구르거나 손을 휘젓는 일보다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으니, 생각 속에서 삐져나오는 일들을 적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 현실. 딱히 슬픈 건 아니지만 답답해지는 날들이 있곤 한다. 특히 환절기에는 말이다. 이쯤이면 환절기 아닌가. 아침 저녁으로는 가을이라는 느낌이 드는. 딱히 가을이라는 계절의 색깔이 사라지고 있으니 여름 환절기와 겨울 초입을 가을이라고 여기며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하였다. 봄 가을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투덜댈 게 아니라 어딘가에는 반드시 남아 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봄과 가을을 찾아내서 함께 놀아주면 봄도 기쁘고 가을도 기쁘고 뭐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라고 우겨본다. 해가 저물고 난 후 다음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날들에 대한 변명. 가을이 섭섭해하면 안 되니까 함께 놀아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름의 언저리에 숨어 있지만 자신을 찾아내주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걸 알고, 좀 웃어보라고 말이다.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힘겨운 고백을 거절당한 후 붉어진 볼을 식혀주니까? 혹은 꽤나 무겁게 여겨지던 머리카락을 마치 비단실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날려주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하게 더위를 식혀주니까? 뭐든 어느 정도는 해당이 되겠지만 바람이라는 건 자신이 서있는 자리가 아닌 곳의 공기를 실어다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닐까. 청명한 아침, 푸른 나무 아래를 종종거리며 어디론가 - 학교든 직장이든 혹은 약속장소이든 - 달려가고 있는데, 바람에 실려온 따끈한 빵냄새. 비록 맛볼 수는 없지만 꽤나 멋진 상상을 가능케 한다. 바람을 통해 아침을 먹다. 라고. 이유없이 멍한 어느 날, 창을 통해 들어오는 거리의 내음. 매캐하든 소란스럽든 상관없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건 꽤 멋진 일이다.
혹 알고 있는가? 기껏 깨어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새벽 2시 50분을 넘기면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는 사실을. 4시 반에 새벽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 그러니까 새벽 2시 50분부터 새벽 4시 반까지는 세상이 상당히 조용하다는 걸 말이다. 거리를 헤매던 사람들도 질주하던 차들도 오토바이도 가만가만 발을 옮기는 시간. 딱 한 시간 40분이라는 휴식이다. 밤 하늘도 꽤 조용하여 구름 흘러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달빛도 별빛도 그저 가만가만 반짝일뿐이다. 아주 살금살금 창을 열고 밖을 보면 적막이 주인인 세상이 드러난다. 그건 새벽의 설레임이다.
딱히 친했던 적은 없지만 퍽이나 매력적이어서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친구가 생각나기도 하고, 결코 사랑한 적은 없었으나 문득 생각해보면 그것도 참 좋은 인연이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떠오르고, 막상 가 보았을 때는 그저 그러했다 싶은 장소도 생각 속에서는 그림보다 아름다운 곳이 되기도 하고, 새벽에 깨어 가만히 있어본다는 것은 또한 소모적이지만은 않은 일. 특히 어딘가에 끼어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과 함께라면 말이다.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새벽은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도 마치 창을 스치며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이내 힘겹게 내달렸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힘껏 내저었던 팔놀림도 멈추게 하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도 쉬게 하고. 그게 가을이 가지는 힘이다. 조금은 따뜻한 듯한 물과 같은 느낌의.
^^* 에 또, 이 글을 동화로 만들기 위한 작은 작업. ^^*
지금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소리. 생명 아닌 생명이 깨어있는 나를 부르고 있다. 어디선가 언젠가인가 들어본 듯한 소리. 아핫, 이상한 나라의 폴이다. ^^ 그 녀석의 성향은 언제나 여름이지만 옷차림만큼은 언제나 가을 같으니까. 삐삐와 찌찌가 시간을 멈추었다고 하고 있다. 이런, 심하게 곤란한 일을. 행복한 시간은 너무 길면 안 된다. 소중함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껏 멈추어진 시간이니 창을 열어보았다. 시간의 문을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녀석들. 폴, 삐삐, 찌찌 그리고 미나까지. <폴 녀석 재주도 좋다. 벌써 미나를 구하다니. 그럼 대마왕은? 나름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살려주구 친구 먹지 그랬어?>내 생각이 이미 읽혔나보다. 폴 녀석이 말한다.
"곤란해. 마왕이 마왕다워야 마왕이지, 착해지면 어떡하니? 난 착한 사람하고만 친구 먹는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먹을 것 없니? 나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어른들한테 야단맞느라고 아침도 못 먹을 텐데..!"
하여, 집에 있는 먹을 것은 죄다 꺼내 주었다. 틀림없이 위기의 순간에 시간을 멈추었겠지? 뭐 만화대로라면 그 순간을 어떻게든 잘 넘기던데. 이번에도 잘 되겠지 뭐. 하는 찰나 시간의 문이 닫히려 한다. 급하게 창을 통해 나가면서 폴이 하는 말.
"너도 생각 속에서만 살지 말고, 너의 미나를 구해보면 어때?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움직이려고만 한다면 너의 삐삐와 찌찌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고 시간의 문이 닫히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런, 가장 조용한 1시간 40분이 2시간으로 늘어나버렸다. 단지 이 땅에서는 나에게만 말이다. 나의 '미나'라. 그건 뭘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미나'를 가져본 적이 없군. 그러니까 '대마왕'과 맞서 싸울 일도 없었고. 바야흐로 가을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염없이 여유를 부리고 싶어지는 이런 계절에 말이다. 꼭 내가 구해야 하는 '미나'라면 굳이 찾아헤매지 않아도 저절로 내게 오지 않을까 하는 무척이나 게으른 생각을 하며 새벽 시간을 정리하고 있다. 그 땐 '미나'도 구하고 삐삐와 찌찌와 대마왕과도 친구 먹어야지. 난 좀 성격 괴팍한 친구도 다양성 측면에서 괜찮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폴도 살살 달래서 폴의 대마왕도 친구 목록에 끼워주게 해야지. 마왕도 혼자서는 심심하잖아. 계절도 곧 가을인데... ^^ 함께하면 좋지 않겠는가.
peace and happy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