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한 마리가 살았다. 스스로 매우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토끼였다. 뭐 토끼라는 녀석에 대한 편견이 없다면 이 토끼는 평범한 게 맞다. 눈 코 입 다 있고, 쫑긋한 귀도 있고, 다리도 네 개다. 물론 두 발로 달리지도 못하고, 네 발로 깡충거리며 달린다. 대체적으로 과묵한 편이지만 의사소통 정도는 할 줄 알고, 모난 성격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제법 이웃과 '가족'같이 지낸다.
토끼는 숲 속이나 너른 초록 들판에 살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없다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빨간 지붕 집을 짓고 사는 토끼를 용납해주기 바란다. 이 녀석에게도 나름대로의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그날 아침도 토끼는 바다 위를 찰박찰박 걸어서 <날 때부터 걸었다. 네 발로. 이걸 꼭 기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걸었다고 하겠다. 에 또, 바다 위를 걷는 건 이 또한 날 때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할 줄 아는 거니까 평범한 거다. <-우겨본다> 거북이를 만나러갔다. 일종의 문안 인사다.
마침 용궁에서 심부름을 나오던 차의 거북이 한 마리. 오랜 친구인 토끼를 보자 무척 반가웠다. <매일 보는데도 반가운건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일 주일에 한 번 보는 이는 일주일마다 그립고, 한 달에 한 번 보는 이는 달마다 그립고, 매일 보는 이는 매일 그립다고 누가 그랬다. <- 나는 절대 안 그랬다.>
"용왕님 건강하시지? 못 뵌지 꽤 됐는데, 언제 한 번 인사드리러 간다고 전해드려."
토끼의 다정한 말에 거북이는 쪼글한 인상이 확 펴졌다.
"덕분이지 뭐. 네가 간을 갖다 주어서 지금은 펄펄 날아다니셔. 네 덕에 승진한 나는 요즘 도우미도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되었잖아."
"어디 가는 길이야? 너희 집에 놀러가던 참이었는데, 다음에 가야 하겠네."
이쯤에서 영민한 사람들은 짐작했을 것이다. 이 토끼는 간을 출입시킬 수도 있고, 간을 하나 주고도 살아서 쌩쌩 돌아다닐 수 있는 자칭 평범한 토끼다. 거짓말쟁이도 아니고, 뭐 거북이의 말에 속아 용왕에게 간 게 아니라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러 용궁에 가서 간을 주고온 그 토끼다. 그리고 하사받은 게 언덕 위의 그 빨간 지붕집이다.
"어, 용왕님이 오늘은 버섯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그걸 구하러 나왔어."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버섯이라면 너보다야 내가 더 잘 알겠지 뭐."
토끼와 거북이와 그리고 도우미인 자가사리는 바다에서 나와 언덕을 지나 숲으로 갔다. <물론 얘들은 육지에서도 살 수 있다. 평범하게 육지에서 적어도 하루 이상은 살 수 있는 바다 생물이다. <- 다시 우겨본다>
느타리 버섯과 양송이와 표고 버섯과 상황 버섯과 새송이버섯을 잔뜩 딴 후에 <이걸 한 군데서, 같은 시간에 그것도 잔뜩 딸 수 있느냐고 묻지 말아달라. 이 버섯이 언제 어느 곳에서 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용왕이 이런 다양한 버섯을 원해서 심하게 충성스러운 거북이가 이걸 다 구했다고 치자.>
거북이 일행이 버섯 묶음을 들고 바닷속으로 사라진 후, 초록 잔디 위에서 토끼는 잠이 들었다. 버섯을 찾느라 꽤 고단해졌기 때문이다. 행복한 꿈 속에서 토끼는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보는 정장 입은 무언가가 되어 굴 속으로 쏙 사라졌다가 무언가 일을 했는데, 그 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 꿈을 전부 기록해 둘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럼 일이 너무 많아지려나? 매 순간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잠 든 순간부터 너무 많은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이라니 말이다,>
낮잠에서 깬 토끼는 저녁거리로 쓸 당근을 캐러 텃밭으로 갔다. <왠 당근이냐고? 말했지 않은가. 평범한 토끼라고. 토끼는 당근을 좋아한다. 버섯은 별로 안 좋아하고.> 주황색이 반질한 당근을 두 뿌리 캐서 빨간 지붕 집으로 돌아왔더니 마침 흰여우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왔어? 먼저 들어가 있지 그랬어, 문 안 잠그는거 알면서."
"방금 왔는데 뭐. "
"당근 스프 만들건데 같이 먹을래?"
이렇게 해서 토끼와 흰여우는 사이좋게 당근 스프를 만들었다.
"접시에다 줘야해. 목이 긴 병에다 주면 절교할거야."
흰여우의 말에 토끼가
"내가 황새냐? "
라고 말했다. <여우가 당근 스프를 먹느냐고? 흠, 여우는 잡식동물 아닌가? 아마 맞을 텐데.. 당근 먹어서 죽었다는 여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서...쩝.>
책을 빌리러 왔다는 여우에게 '시튼 동물기'를 빌려주고 난 후, <여우는 이리왕 로보를 참 좋아한다. 끝에 죽는데, 왜 좋아하는지 토끼는 모른다. 일종의 가학 취미일까?라고 생각해 본적은 있지만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나름 소심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는 '당근 송'을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좋았다.
"벌써 해가 지려고 하네. "
문득 창 쪽으로 눈을 돌린 여우가 말했다.
"그러게,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저물었군. 감사한 일이야"
"책은 내일 모레 돌려줄게."
여우가 돌아가고 난 뒤, 토끼는 이웃집 고슴도치에게 들러 함께 산책을 하러 갔다.<둘이서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다. 좀 토실해보이는 지라 무게를 줄일 필요가 있다.> 도치군과는 붙어 있으면 가끔 따끔거렸지만 이제는 견딜만 했다.
"고슴도치 군, 내일 등산이나 갈까? 오늘 버섯을 캐다 발견했는데, 흰 여우 집 뒤로 멋진 산책길이 산쪽으로 나 있더라구."
"그러지 뭐. 특별한 계획은 없으니까." <사실, 계획이 있어도 가야 한다. 살 빼는 일이 산책만으로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부단한 노럭이 필요하다.>
그렇게 다시 하루 해가 저물고, 집으로 돌아온 토끼는 평범해서 참 행복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달빛 아래에서 토끼의 초록색 털이 유난히 보들보들해 보였다.
peace and happy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