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날들의 연속. 나는 사과 나무 아래의 여우 한 마리이다. 매일 사과 나무 아래에서 무얼 하느냐고 물어봐 주길 바란다. 굳이 네가 어린 왕자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말이다.
<여우 한 마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너는, 사과 나무 아래에서 매일 무엇을 하고 있지? 난 어린 왕자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 뭐 그것도 언제부터인가는 깜빡깜빡하고 있지만 말이야. 나와 단지 시간만 존재하다 보니까 그게 너무 익숙해져버렸어. 그래서 시간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할퀴고 지나가는 것에 무감각해져버렸어. 쓰라리다거나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다거나 뭐 그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된지 오래야.
<다른 일을 해 보는 건 어때? 너무 익숙한 일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 보는 거야. 예를 들자면, 너는 지금 사과 나무 아래 서 있으니까 사과가 얼마나 반질하게 익어가는가를 관찰하는거야. >
난 사과를 먹지 않아. 사과 나무 아래 서 있기는 하지만, 사과에 관심이 없어. 그저 내가 서 있게 된 곳이 우연히 여기였을 뿐이야. 그러니 사과가 익어가는 것에도 당연히 관심이 없을 수밖에
<이건 그냥 해 보는 말인데 말이야, 그럼 네가 관심이 있는 것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책에서 봤더니 너는 닭을 잡아먹는다더군. 그럼 닭장 옆으로 가는 거야.>
닭장 옆은 소란스러워. 뭐, 그것대로 괜찮을 수도 있지만 멋잇감 옆에서만 뒹굴다 보면
먹이는 먹이대로 도망갈거고, 나는 나대로 배부른 돼지에 머물게 되겠지.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소란스러운 걸 견뎌내지 못 한다는 사실이야. 무척 곤란하지.
난 지금 무척 무료해. 아무리 기다려도 밀밭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오지 않고, 내가 닭을 잡아먹으면 먹을 수록 사냥꾼 무리들은 나를 잡으려고 혈안들이야. 그건 참 무서우면서도 무료한 일이야.
<차라리 사냥꾼을 친구로 삼으면 어떨까? 흠, 여우로서는 안 되니까, 맞아, 귀여운 고양이로 변장을 하고. 고양이 탈을 쓰고 얌전히 굴면 사냥꾼들이 속아넘어갈 지도 몰라. >
고양이가 되면 뭐가 좋은데?
<고소한 우유를 매일 마실 수 있어. 볕이 따뜻한 곳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낮잠으로 보낼 수도 있고, 가끔 '야용~'하고 울어주기만 하면 쥐들이 무서워하니까, 넌 네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거야.>
우유라~. 먹지 않아. 비릿한 맛이 싫거든. '야옹~'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그건 참 뽀대가 안 나는 일이잖아. 그리고 체질적으로 난 잠이 많지 않아. 햇살 아래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럼 다시 물을게.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그걸 네가 가르쳐줬으면 좋겠어. 예전에는 누군가 달려!라고 하면 달리고, 멈춰!라고 면 멈추고, 먹어!라고 하면 먹고, 울어!라고 하면 울었는데, 이제 그걸 지시해주는 게 없어. 난 뭘 해야 하지? 그저 우연히 이 사과 나무 아래에 서 있지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쩌면 여우가 아닌 게 아닐까. 그저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일지도 몰라. 그러고보니 네가 서 있는 그 곳, 그 나무 말이야. 사과나무가 아니라 그저 언덕 위의 앙상한 한 그루 나무 같은데. 희망없는 땅의 말이야.>
뭐? 사과 나무가 아니라고? 그러고보니 그저 '어떤 나무'같군. 사과라고는 열린 적이 없는. 이런, 지금까지 난 속았던 거야. 이건 사과 나무가 아니야. 내가 기다리는 건 어린 왕자가 아니야. 그리고 난 여우 한 마리가 아니야. 그럼 난 뭐지? 믿을 수 없어. 난 늘 닭을 잡아 먹었는데. 난 늘 사냥꾼들에게 쫓겼는데. 내가 무얼 한거지?
<이봐. 넌 정말 심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단지 가능성을 얘기했을 뿐이야. 지금 내 눈에 넌 여우의 모습인걸. 털빛이 아주 고운. 그저 네가 한심한 얘기만 늘어놓길레, 한 마디 했을 뿐이야. >
아, 그래. 그럼 난 아직 여우인거지? 내가 서 있는 곳은 사과 나무 아래이고. 난 오늘도 닭을 잡아먹을 수 있어. 그리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거야. 갑자기 기뻐졌어. 어제와 같은 내가 될 수 있어서.
<이건 지금 생각한건데 말이야. 여우 너의 일상은 너에게 무료하기만 한 거야? 지금 무료함이 조금 어긋나려했을 때, 네 반응은 정말 가관이었어. 당황스러워하고,. 단지 가정이었을 뿐인데. 넌 무료하다고 소리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만 사실은 어떤 변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저 입으로만 변화가 필요하다고 떠들뿐. 넌 그저 생각하는체하는 수다쟁이일 뿐이야.>
그렇지 않아. 난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해. 어린 왕자가 온다면 내 생활은 달라질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문제이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린 왕자가 올거야. 그리고 내 생활은 확 달라질거야. 책에 틀림없이 그렇다고 적혀 있었어.
<사과나무 그늘에서 좀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네가 과연 어린 왕자를 볼 수 있을까? 이미 수많은 어린 왕자가 네 눈 앞을 걸어서 지나갔을테지만 너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온전히 볼 수 없었어. 왜냐하면 너는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변화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난 어린 왕자는 아니지만. 그저 길을 가던 사람이지만, 밀밭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이내 이 자리를 떠나 내 길을 갈거야.>
나 역시 내 길을 갈 수 있어. 어린 왕자만 온다면 변화할...거야. 무료해지지도 않을거고, 사과에 흥미가 생길지도 몰라. 사냥꾼과 친구가 될 지도 모르고.
<그건 어린 왕자가 오지 않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야. 넌 단지 핑계를 대고 있는 거야. 아무 것도 하기 싫으니까. 넌 젠체 하는 일을 즐기고 있어. 너에게는 영원히 어린 왕자란 없을 걸. 작품 속에 영원히 등장하지 않는 '고도'처럼. 너의 책에 '어린 왕자'는 등장하지 않아. >
- 말을 마치고 제 길을 가는 '어떤 사람' 타박한 걸음. 햇살을 받아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빛나는 걸음걸이. -
뭐야, 무료함을 달래려 했더니 된통 당했잖아. 이번 어린 왕자는 말을 거칠게 하는군. 그래봤자 난 달라지지 않을 텐데. 아, 심심해,. 또 다른 어린 왕자 녀석은 언제 오는 걸까. 뭐, 오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말이야. 난 무료하고 심심할 뿐이야. 단지 그것 뿐이라고.
관조만 하는 자, 변화를 바란다고 말만 하는 자,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하는 자,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하는 자, 대안 없이 비난만 일삼는 자, 타인에게 준 상처는 잊고, 받은 상처만 곱씹는 자, 거울 밖에 그런 내가 있다.
..... peace and happy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