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나는 딱 가운데 길을 택했다. 뭐든 균형 잡힌 것이 좋다는 주의였으니 말이다.
"이제 가시려구요?"
불을 피운 자가 물었다.
"네. 지금 떠납니다. 불을 피운 분께서는 이번에도 가장 나중에 출발을 하시려나 봅니다. ^^"
"허허. 저를 아시는군요. 웬지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싶었습니다. "
"네, 지난 번에는 말의 힘을 믿는 분이었지요. 지금은 불을 피우면서 그 일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요?"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듯했다. 순간 따스한 기운이 주위를 맴돌았다.
"^^ 당신에게도 축복이 필요한지 모르겠군요. 어쩌면 제가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불을 피운 자의 말에 피식 웃고 돌아선 헤나는 가운데 길 앞에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아세요?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요. 그런데 날 때부터 집이란 게 없었던 사람은 자신의 파랑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한참 곰곰이 있던 불을 피운 자가 길을 이미 걸어가고 있는 헤나에게 말했다.
"... 당신에게도 축복을. 당신이 파랑새를 키울 수 있는 집을 찾게 되기를."
헤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떤 형태의 길이든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이면 그저 길이라는 생각을 헤나는 하고 있었다. 눈밭 길이든, 빙판 길이든, 질척거리는 길이든, 단단한 땅이든 그 어디든 말이다. 아, 딱 하나, 풀밭 길은 예외였다. 폭신한 느낌이 안온한, 풀밭길은 헤나가 그저 좋다고만 느끼는 길의 형태였다. 풀밭을 걸으면 왠지 참 좋은 곳이 나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헤나가 택한 가운데 길에는 풀밭이 없었다. 그냥 땅이고, 땅이고, 땅이었다.
"아, 정말 심심하기 그지 없는 길이군. 어떻게 똑같은 길이 끝없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거지?"
이런 곳에서는 파랑새를 키울 집은 커녕, 대들보 하나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흔한 나무 그늘 하나도 없는 땅에서 헤나는
"아, 균형이란 좋은 것만은 아니야. 언제나 너무 반듯하다니끼."
하고 투덜거렸다. 그 때였다. 모래알 같은 게 움직인 것은 말이다. 총총총총 헤나의 발 아래를 지나가는 것들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운반하는 개미떼였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그들 중 한 마리를 붙잡아 손바닥에 올리고 물어보았다.
"이봐, 이 척박한 땅에서 뭐하는 거야?"
"가꾸는 거야."
"뭘?"
"땅을,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뭐하러 그렇게 힘든 일을 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되지."
그러자 개미가 등에 졌던 짐을 탁 내려 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에휴~ 힘들어'하는 듯 한참 앉아 있더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헤나에게 말했다.
"버리고 떠나는 것도 한두 번이더라구.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트집 잡으며 떠나버린게 여러 번인데 말이야, 그러다 보니 남는 땅이란 건 없더군. 그저 피곤함과 허탈감 뿐이었어. 그래서 생각했어.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말이야."
헤나와 개미 한 마리가 얘기 하는 사이 발밑으로는 끊임없이 개미들이 움직여다녔다. 한눈도 팔지 않고 끝없이 끝없이 말이다.
"쉬지도 않고 저들이 하는 일이.... 정말 땅을 가꾸는 거야?"
"어. 필요할 경우 지렁이나 우렁이의 도움도 받고 있어. 생명이 살아 숨쉬는 땅을 우리가 이곳에 만들기로 했거든. "
"이렇게 조그마한 너희들이 이 넓은 땅을 언제 생명으로 가득 채울건데?"
헤나의 의아해하는 물음에 개미 한 마리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어. 우리 다음의 개미들에게 우리와 같은 허탈감을 물려줄 수는 없는 거거든. 우리부터 움직이면 세상은 아주 조금씩이라도 달라질거라 믿어. 벌써 저 너머 산에는 들풀이 자라고있는걸."
헤나가 깨금발을 딛어 멀리 바라보니 아질아질하게 초록 바닥이 보이는 듯했다. 손바닥만하지만 틀림없는 변화였다.
"이제 내려놔 줘. 일하러 가야해."
헤나가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자, 개미 한 마리는 총총히 자기 길을 갔다.
"이봐, 지금 정확히 너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뭐라고?"
"씨앗을 심고 있어. 생명을 끌어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내가 그 위에 집을 지어도 괜찮을까?"
"능력이 된다면 좋을대로 해."
그리고 개미는 사라졌다. 고 자그마한 녀석이 제 일을 하러 가 버린 것이다.
헤나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파랑새를 키울 집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집을 찾아 길을 떠나기만 했지 집을 지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길 위헤서 집을 발견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언제나 창문이 삐뚤다라거나 지붕 모양이 어지럽다거나 커튼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헤나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완성된 집이 아니라 집을 지으려는 각성 뿐이었는데 말이다.
걸음을 떼어, 헤나는 개미들의 풀밭을 찾아가 보았다. 생각보다 꽤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폭신하고, 아늑했다. 일하는 개미들을 피해서 드러누워보았다. 넉넉하게 받아주는 것 같았다.
"이봐, 너무 오래 누워 있지는 마. 풀이 으깨지면 다시 살아나기 어렵다구."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며 말했다. 정감이 가는 목소리였다.
"아, 나도 도울게. 내가 도우면 일이 좀 더 빨리 진행되지 않을까? 한 백 마리 분의 일은 해 낼 자신이 있어."
"좋을대로. 일하겠다는데, 막을 개미는 없어."
헤나는 짐을 부려두고 씨앗 옮기는 일에 나섰다. 지렁이들이 바지런히 흙을 고르고 있는 틈에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고 물을 뿌렸다. 이중 적어도 10분의 1 정도는 싹이 틀 것이고, 노력한 것의 10분의 1 정도는 희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믿었다. 그러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콧노래를 부르는데, 개미들이 일을 하다 말고 말했다.
"꼭 파랑새가 지저귀는 것 같아."
라고 말이다. 이제 비가 내리고, 땅이 굳고 해가 비치고 바람이 불면 이 척박한 땅에 풀이 돋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랄 것이다. 그리고 이내 개울도 흘러가겠지. 그 옆에 작은 집을 지은 헤나는 자신의 파랑새를 키우며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적어도 10년 내에는 말이다. 그 때쯤이면 개미들의 낙원과 지렁이들의 터전과 우렁이들의 공간도 생겨나 있을 테고. 때로 땅 때문에 혹은 먹을 거리 때문에 다투는 일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함께 이 땅에 꿈을 심었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