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강하지 않은 바람이 쉬지 않고 불던 날 오후였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민들레씨 한 톨이 사뿐히 구석진 바닥에 착지했습니다.
"끄응~ 누구지, 나의 잠을 깨우는 건?"
막 잠에서 깬 듯 바위가 기지개를 켜며 반쯤 감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바위의 눈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 이상하다.. 분명 누가 나의 등을 간질였는데.."
바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또다시 잠을 자기 위해 살며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바위는 작은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아이, 추워.. 아이, 차가워.."
"... 이상하다.. 아무도 없었는데.. 주위에 누구 있니?"
바위는 속삭임이 들린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습니다.
"쿨럭.. 나 여기 있어.. 너 밑에. 쿨럭.."
또다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궁금함을 참다못한 바위는 소리쳤습니다.
"난 전혀 보이질 않는걸.. 조금 더 바깥으로 나와봐.. 난 니가 보고 싶어."
그러자 다시 한 번 작은 속삭임이 바위의 귀를 스쳤습니다.
"난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수가 없어.. 난 단지 씨앗일 뿐이니까.. 민들레씨앗.. 하지만 니가 지금 바람을 모두 막고 있잖아.. 따뜻한 햇볕마저도.. 그래서 난 너무 추운걸.."
순간 바위는 자신이 민들레씨앗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바위도 땅속 깊이 박혀 있는 터라 어떻게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생각끝에 바위는 밝은 목소리로 민들레씨앗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럼 민들레씨앗아.. 나에게 기대봐.. 나는 햇볕을 모두 받으니까 따뜻하게 데워져 있을지도 몰라.."
"아니, 그렇지 않아.. 넌 너무 차가운 걸.. 단지 햇볕을 받는 앞쪽만 따뜻하게 데워져 있잖아.."
민들레씨앗의 말을 들은 바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거구나.. 하지만 나도 움직일 수 없는걸... 난 커다란 바윗덩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너.. 햇볕없이 지낼 수 없는거니? 여긴 흙도 좋고 비도 적당하게 오는걸.. 그러니까 햇볕정도는 없어도 참고 지낼 수 있지 않니?"
민들레씨앗은 바위의 그 말을 듣고 어느 정도 바위의 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너.. 나한테 미안한거지?"
갑작스런 민들레씨앗의 물음에 바위는 당황했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그, 그래.. 미안해.. 내가 너한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게 미안해.. 내가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해.."
조용조용 들려오는 바위의 말들을 듣는동안 민들레씨앗은 바위와 친구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떠밀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얼른 땅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 먼 숲속의 참나무에게까지 들릴만큼 큰 목소리로 밝게 말했습니다.
"어떻게든 견뎌볼께.. 난 니가 좋아졌으니까.. 그래서 너랑 헤어지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바위야, 너 내 친구해주지 않을래?"
말을 끝낸 민들레씨앗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위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민들레씨앗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쑥 빼고 바위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바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 나랑 친구하고 싶다고 했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위는 민들레씨앗에게 되물었습니다.
"응.. 어차피 난 이제 바람에 날려가지도 않을거야.. 벌써 뿌리를 내렸거든.. 내가 죽을때까지 너와 함께하고 싶어.."
민들레씨앗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내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래, 바위야?"
바위는 너무 기뻐
"응.. 응."
이란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민들레씨앗과 바위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분좋은 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위는 자신의 등 뒤에서 새싹으로 자라난 민들레씨앗을 바라볼 수 없음이 언제나 안타까웠고, 민들레씨앗은 점점 햇볕을 받을 수 없는 생활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들레야.. 너 정말 괜찮은거니, 응? 나때문에 너무 힘들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위해서 난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어.."
바위는 매일을 이렇게 울먹이며 민들레씨앗을 걱정했습니다. 그럴때면 시들하게나마 꽃을 피운 민들레는 매일 바위를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마.."
그러나 민들레는 갈수록 기운이 빠졌습니다. 꽃잎이 자꾸만 사람의 발에 짓밟힌듯한 색으로 변해가고,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워 졌습니다. 결국 어느 날부터인가 민들레는 바위의 등에 가만히 몸을 기대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 있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민들레야, 괜찮은거니? 난 니가 계속 내 등에 기대있기만 하니까 걱정돼.."
바위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민들레에게 물었습니다.
"걱정마.. 난 그냥 니가 좋아서 그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은걸.."
민들레의 말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 바위는 매일밤을 뜬눈으로 지샜습니다. 눈물이라도 있으면 마음껏 흘려보고도 싶은데 바위는 그저 바위였기에 눈물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위는 아픈 가슴을 달래려 밤마다 떨어지는 별들을 향해 기도를 했습니다. 생각같아서는 낮에도 기도를 하며 마음을 달래고 싶었지만 민들레에게 자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안함을 얘기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괴로워하는 민들레의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를 지키고 싶은 바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별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저는 평생동안 민들레의 모습을 볼 수 없다해도 좋습니다. 욕심내지 않을게요.. 민들레를 바라보려 헛된 소망을 품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민들레를 살려주세요.. 차라리, 민들레대신 저를 힘들게 하세요."
바위는 잠시 자신의 등에 기댄 민들레의 숨결을 느끼며 별님을 향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제 생명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민들레보다 제가 너무나도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하늘은 너무나도 가진 게 많잖아요.. 별님도, 달님도, 구름도, 태양도..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민들레마저, 제 유일한 친구마저 빼앗아가려 하세요.. 별님이 말려주세요.. 별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친할꺼잖아요.. 민들레가 하늘나라에 가면 하늘은 그저 수많은 민들레꽃 속에 파묻힐 시들한 민들레꽃 한 송이를 얻는 것뿐이지만... 저는 제 유일한 친구를 잃는 거잖아요.. 전 민들레없이 이 곳에 머물 용기가 없어요.. 제가 산산조각나서 더 이상 바위가 아니게 되더라도 민들레만은, 민들레만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민들레만은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날 밤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끝낸 바위는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물기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물기는 단순한 빗물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빗줄기와 구분되게 따스한 온기가 있었습니다. 바위는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내가.. 민들레를 위해서 울어준거야? 내 친구 민들레.."
다음 날 아침, 민들레는 자신의 시든 잎에 떨어진 빗방울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곧 다른 빗방울들과 다른 한 물방울을 발견했습니다.
보석처럼 찬란히 빛나고, 따스한 온기가 있고, 왠지 마음이 포근해지게하는 광택을 가진 자그마한 물방울이었습니다. 눈물이란 것을 이곳까지 날려오기 전 엄마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던 민들레는 바위가 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바위의 눈물을 알고 나서부터 민들레는 바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바위는 자신을 위해서 눈물까지 흘려줬는데 자신은 가끔 햇볕을 가리는 바위를 원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해주는 바위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민들레와 바위는 어느 날부터인가 말없이 서로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도 바위의 기도는 밤마다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우연히 바위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던 하늘은 시들한 민들레꽃 한송이보다는 커다란 바위가 더 좋은 거라고 판단하고, 바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별똥별을 시켜 바위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여전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바위의 곁에 별똥별이 가볍게 착지했습니다. 바위는 처음보는 별똥별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 없이 별을 바라만보고 있었습니다. 순진한 바위의 얼굴에 별은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하늘의 말을 전했습니다.
"바위야.. 하늘께서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셨어.. 너의 친구 민들레 대신 너를 데려가겠다고 하셨어. 어때, 맘에 드니?"
순간 바위의 마음은 뛸듯이 기뻤습니다. 자신이 너무너무 좋아해서 늘 곁에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게 만드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도록 하는 친구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별님.."
다시금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바위는 별에게 몇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별은 그런 바위를 바라보며 가슴 한 구석이 휑하니 비어버린듯 쓰려옴을 느꼈습니다. 바위의 마음이 너무 애틋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네가 민들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사랑하면 헤어지기 힘들꺼야.. 바위 네가 하늘나라로 가게 되면 다시는 민들레를 볼 수 없어. 그러니 미리 민들레에게 이별을 고하는 게 좋을거야.."
갑작스런 별의 말에 바위는 놀란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그러나 놀란 것은 바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위의 등에 기대 잠을 자다 우연히 별의 목소리에 잠을 깬 민들레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금 더 오래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서 민들레의 생명을 살리려는 건데 영영 헤어지게 된다니..
그러나 한 번 한 약속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별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먼 길을 떠났고, 그날 이후로 바위와 민들레는 말이 없었습니다. 차마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질 않았던 탓도 있었고, 또한 우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 마음아프게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쪼개질듯한 시린 얼음빛깔의 구름장들이 하늘을 뒤덮은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잔뜩 흐려있던 하늘은 저녁이 되자 엄청나게 많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심한 천둥번개가 한바탕 바위의 곁에 머물다 간 뒤 비는 그쳤습니다.
그리고 민들레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햇볕이 민들레에게 와 닿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민들레는 왠지 옆이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아도 바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서 민들레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멈춰버렸습니다.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푹 꺼진 구덩이..
민들레는 그것이 바위가 머무른 흔적임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민들레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참을 수 없을만큼 아픈 마음을 내보내려는 듯 민들레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지난 번 바위가 흘렸던 눈물만큼이나 따뜻하고, 영롱한 광택이 나는 그런 아름다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민들레는 그 아름다운 눈물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민들레의 두 눈에 가득 고여버린 눈물때문에 모든 것들이 흐릿해져 눈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민들레는 바위에 의해 생긴 움푹 패인 그 자국만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매일같이 흐릿한 영상속에서 살았습니다.
바위에 의해 생긴 움푹 패인 자국.. 그것은 바위의 큰 몸집에 가려 힘들게 자라난 새싹의 가슴 한구석을 도려낸 자리인양 그렇게 큰 아픔을 남겼습니다.
이미 하늘을 향한 먼 여행을 시작했을 바위... 그런 바위의 생명을 받은 민들레는 하루하루를 그리움으로 보내며 어느 새 아기같던 노란 꽃잎들을 떨구어내고 하얗게 민들레꽃씨를 품어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꽃씨들을 날려보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큰 아픔을 주고, 생명에까지 지장을 줬던 바위였지만 정(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던지 민들레는 자신의 아픔을 모두 잊은 채 바위만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꽃씨들을 다 떨구어낸 지금은..
그토록 그리웠던 바위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