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소소
한 달하고도 십오일 전에 민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민수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마주 오던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차는 크게 부서지고 깨어진 유리 파편에 민수도 심한 부상을 입게 되었지요.
두 번의 수술을 받은 끝에 팔에는 약간의 흉터가 남긴 했으나, 다행히 다 나을 수 있었지만 눈은 아직도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병원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지내야만 했습니다. 의사들이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눈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작은 유리 조각들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수술을 한 번 더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술 후에도 확실히 다 나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의사들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민수는 요즘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두 달 정도를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지만 지금은 따뜻한 낮에 한해서 병원 마당에서의 산책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을 볼 수 없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엄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야만 하고, 또 민수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답답한 병실을 떠나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수의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점심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엄마를 졸라 병원 뒷마당으로 산책을 나왔습니다. 멀찌감치 담 너머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나고 가끔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함께 걸어가며 나누는 얘기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이제 여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오늘은 날씨가 약간 더운걸. 민수야! 엄마가 뭐 마실 것 좀 갖다 줄까?”
엄마의 목소립니다.
“네, 엄마. 시원한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그럼 엄마가 얼른 뛰어갔다 올 테니 잠깐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그럼요, 엄마.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이젠 엄마가 급히 매점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두 달 정도를 눈을 가린 채 지냈더니 민수는 이제 제법 여러 소리들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또렷한 건 물론 자나깨나 민수 옆을 지키시는 엄마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입니다. 그밖에도 민수는 그 동안은 잘 듣지 못했던 많은 소리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무 그늘 아래에 있을 때 들리는 여러 작은 풀벌레 소리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마저도 그 사람의 몸무게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오렌지 주스를 사기 위해 엄마가 매점으로 가신 이후에는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지 나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한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안녕?”
그 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소리로 보아 민수와 비슷한 또래인 듯 싶습니다.
민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병원에서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할 만한 또래 소년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러나 그 낯선 목소리에 대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녕? 내가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너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보구나? 참으로 실망인걸.”
다시 그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역시 아무도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민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구? 혹시 나한테 한 말이니?”
민수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답해 보았습니다.
\"야호! 역시 내 말이 들리는구나. 그래 너! 휠체어에 앉아서 눈에는 하얀 붕대를 돌돌 감고, 파란 슬리퍼를 신고있는 너! 맞아.”
“내가 신고있는 슬리퍼가 파란색이니? ”
“아하! 아무도 네게 너의 슬리퍼 색을 말해주지 않았구나?”
낯선 소년의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신고 있는 슬리퍼 색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그런데 너는 누구니? 너도 어디가 아파서 여기에 온 거니?”
민수가 물었습니다.
“아니야. 나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아. 나는 그저 지나는 길이었는데 네가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어. 그래서 잠깐 인사나 나눌까 하고 온 거야. 너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소년은 아주 신이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었거든요. 그런데 민수는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내가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니? 내가 눈을 다쳐서 볼 수 없긴 하지만 두 귀는 이렇게 멀쩡하다구.”
민수의 말에 낯선 소년의 목소리는 한바탕 경쾌하게 웃고 나더니 그 질문에 대한 뜻밖의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거든. 사람들은 눈으로만 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가 가끔 신문지나 나뭇잎을 이리저리 날려보기도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야. 여전히 우리 목소리는 듣지 못하거든. 사람들의 귀가 너무나도 많은 소음 때문에 아주 둔해져 버린 거야.”
민수는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정리해 보려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지만 어리둥절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황한 민수가 소년의 목소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니?”
그러자 소년의 목소리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바람이라고 부르지.”
민수는 멍해지는 것 같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보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민수는 지금 앞을 볼 수 없는 자신을 놀리려는 어떤 심술궂은 소년이 자신의 앞에서 심술궂은 눈으로 자신을 조롱하며 서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하하”
커다란 소년의 웃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세찬 바람이 민수의 얼굴을 덮칩니다. 민수의 머리카락들이 모두 빠질 듯 뒤로 확 제쳐지고 갑자기 밀려든 바람이 코로 세차게 밀려들어와 민수는 잠시동안 숨을 쉬는데 애를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하하! 너무 놀랄 것 없어. 내가 장난 좀 친 것뿐이니까. 나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너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거든. 자신의 입이 흉하게 헤 벌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들은 말을 어떻게 해서든 부정해 보려고 애쓰거든. 하지만 결국 모두 나를 인정해 주고 말았지. 그들은 모두 순수하거든.”
그제야 민수는 자신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갔을지도 모를, 입안에 고인 침을 급히 삼켰습니다.
민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소년의 목소리, 아니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정말로 바람이 맞다면 그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 수 있겠니? 그러니까 내 말은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지금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니 정말로 네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게 아니란 걸 꼭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그......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 머리카락을 다시 날려본다던가 뭐 그런 식으로......”
민수의 말에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민수는 혹시라도 자신의 말에 화가 나서 바람이 그냥 가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며 작은 소리나 바람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목 뒷덜미가 간질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부드러운 입김으로 후후 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간질거려서 민수는 목이 저절로 잔뜩 움츠러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코가 간질간질 거립니다. 꼭 강아지풀을 콧속에 집어넣고 있는 듯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취!”
드디어 재채기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병원에 있는 동안 제대로 자르지 않아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 듭니다. 무서워서 소름이 끼칠 때 머리카락이 곤두선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민수는 지금 무섭지도 소름이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민수의 발 밑에서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아래로부터 불어와 민수의 머리카락들이 모두 곤두서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들이 모두 곤두서자 이제는 머리전체가 간질거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하하! 이제 그만, 그만. 너를 믿을게,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제발 그만, 그만. 하하하!”
간지러움에 움찔움찔하며 웃고있는 민수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자기를 인정해준 것이 기뻐서인지 바람도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믿어줘서 고맙구나. 내 이름은 소소라고해”
그렇게 해서 그 날 이후로 민수와 바람 소소는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민수와 소소는 매일 오후가 되면 병원 뒷마당에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민수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여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민수는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그냥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듯이 가만히 있어야만 했지만 소소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마냥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삼촌은 힘이 아주 센 데다 성격도 아주 급하지. 그래서 가끔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돌풍을 일으키고 말아. 지난번엔 암소 한 마리를 통째로 들어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있는걸. 그것 때문에 우리 할머니는 항상 걱정을 하셔. 할머니는 우리 바람들이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거든.”
소소는 또 이곳 저곳을 여행한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습니다. 소소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바다를 건너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엄마나 아빠로부터 들은 다른 나라에 대한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민수는 소소에게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라든지 전화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혹은 텔레비전 같은 물건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는데 소소는 그 중에서도 텔레비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을 볼 수 있는 천연 색깔의 그림들로 가득 찬 상자-소소가 생각하는 텔레비전의 모습입니다-를 소소는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 몰래 병실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엄마는 바로 옆에 소소가 있어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지요. 소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니까요. 대신에 오늘은 이상하게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네 하며 자꾸 창문만 열었다 닫았다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어요. 민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병원 생활 내내 민수 옆에서 간호하느라 피곤에 지친 엄마의 작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민수야!”
“소소?”
“쉿! 조용. 네 엄마가 깨실 지도 모르잖아. 나랑 잠깐 갈 데가 있는데 지금 나갈 수 있겠니?”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았어”
소소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민수의 귓가에 작은 바람이 스쳤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누군가가 앞에서 쭉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수는 소소가 자신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끌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이어 민수의 두 뺨에 찬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드디어 병실 밖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민수는 자신의 몸이 여전히 공중에 붕 떠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공중에 떠 있잖아!”
“그래 내가 너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 동안은 땅에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민수는 너무나도 신이 났습니다. 지금의 광경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흥분만으로도 날아오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자는 거지?”
“우리 할머니한테. 우리 할머니는 항상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거든. 그런데 이번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이곳에 와 계시거든. 그래서 너를 우리 할머니께 소개 시켜 주려고. 우리 할머닌 생명의 불을 갖고 계셔”
“생명의 불?”
“그래. 생명의 불은 어떠한 병이나 상처도 단번에 낫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으시지만 내 부탁이라면 할머닌 꼭 너의 눈을 고쳐주실 거야.”
다시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민수는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생명의 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소의 할머니가 꼭 소소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소소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날아온 것 같습니다. 소소의 말로는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 하나와 산을 세 개나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소소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멈추어 버렸습니다.
“어! 이상하네?”
“소소,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상하네. 저 밑에 있는 골짜기에 바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있는 것 같아. 나무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 알 수 있거든.”
“그게 왜 이상하다는 거지?”
민수가 물었습니다.
“보통 바람들은 한 곳에 저렇게 많이 모여있지 않아. 잘못하면 큰 돌풍이나 태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에 피해를 주게 되거든. 그래서 우리 바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저렇게 모여있지 않아. 일종의 약속이지.”
소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모두들 중요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다른 산에 모여 있어야 할 시간인데 말이야. 그것 때문에 우리 할머니도 먼 곳에서 일부러 오신 거구......”
소소는 잠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 내려가 보자.”
한참이 지난 후에 소소는 결심한 듯 민수에게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민수는 소소가 자신을 데리고 곧장 아래로 향하고 있다는 것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소의 말을 듣고 민수도 약간의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빠른 속도로 숲을 향해 내려가는 것은 마치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어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소소는 아주 부드럽게 민수를 땅에 내려주었습니다.
“민수야 여기 나무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좋겠어. 어쩐지 수상하단 말이야.”
민수는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나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조용히 숨을 죽였습니다. 그건 소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잠시 동안 민수의 귀에 소소의 목소리나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잠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처럼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페페 할멈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올 리가 없지.”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페페 할멈이라면 소멸의 불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할멈 말인가? 그렇다면 큰일이군. 자칫하면 우리 모두 커다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건데.......”
“맞아 자칫하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구. 너무 위험해. 우리의 계획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세 번째의 낯선 목소리에 처음에 들려왔던 굵은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들을 하는군. 페페 할멈이든 누구든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어. 차라리 이번에 다른 바람들과 함께 페페 할멈을 싹 쓸어 없애버리고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을 빼앗아 버리는 거야. 그럼 우리에게 대적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게 되지.”
“하지만 뚜베르, 그 할멈이 우리를 향해 소멸의 불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하지? 우리는 모두 산산이 흩어져 버릴거라구. 죽게 된다는 말이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리가 이렇게 숨어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야. 이번에야말로 페페 할멈과 놈들을 어떻게 해서든 싹 쓸어버리고 이 땅을 차지해야만 해!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를 노려서 말이야.”
“맞아! 맞아! 뚜베르 만세!”
거기에 모여있던 자들이 흥분을 하였는지 윙윙거리는 듯한 바람 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는 바람에 그들이 하는 말소리가 민수의 귀에 잘 들리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소소가 민수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여길 어서 빠져나가야 해. 저들은 모두 어둠의 바람들이야, 위험한 자들이지. 파괴를 일삼기 때문에 이 곳에서 추방되었던 자들인데 언제 이 곳으로 다시 숨어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아마 그 때문에 우리 할머니가 급히 돌아오신 모양이야. 그들이 우리 할머니와 다른 바람들을 노리고 있어. 어서 가서 알려드려야 해.”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웅성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쉿! 모두들 조용히 해!”
뚜베르라고 불리던 굵은 목소리였습니다.
“여기에 우리말고 다른 녀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모두 흩어져서 찾아봐!”
“하지만 뚜베르 여기에 다른 녀석들이 기웃거릴 이유가 없잖아. 모두들 페페 할멈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을 텐데”
“이런 바보 같은 놈!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단 말이야. 모두 잔말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하란 말이다.”
그 뚜베르란 자가 무섭게 고함을 지르자 다른 바람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여기저기 수풀과 나무 사이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자신과 소소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내는 소리에 민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엄청난 계획을 엿들은걸 안다면 이 무서운 악당들이 소소와 자신을 가만둘 리 없었으니까요. 그때 소소가 민수의 귀에 대고 재빠르게 속삭였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위험해질 거야. 너는 여기에 꼼짝 말고 숨어있어. 그리고 나중에 안전해 지거든 우리 페페 할머니를 찾아.”
민수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소소는 황급히 어디론 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더니 저쪽 어딘가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기다! 잡아라!”
민수의 귀에 무시무시한 바람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용해 졌습니다.
“저쪽으로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았어. 요 맹랑한 꼬마 녀석이 우리들의 말을 몰래 엿들은 거라구. 가만두지 않겠어.”
“놔! 놓으란 말이야. 어서 나를 놓아줘!”
“잠깐!”
몸부림치는 듯한 소소의 목소리에 이어 뚜베르란 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놈은 아주 낯이 익은걸...... 가만 있어보자. 맞아! 이 놈은 바로 그 페페 할멈이 애지중지하는 손자녀석이야. 틀림없어. 하하하, 이 놈이 이렇게 우리 손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우리에겐 더 없는 행운이로군.”
“그게 무슨 소리지?”
“이 녀석이 우리 손에 있는 한 그 할멈이 우리를 향해 함부로 소멸의 불을 사용하지는 못할 거란 말이야. 자기의 귀염둥이 손자마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게 뻔하거든. 그 할멈에게서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을 빼앗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 거지.”
그 어둠의 바람이란 자들은 신이 났는지 마구 웃고 떠들어댔습니다. 소소가 놓아달라며 계속해서 소리치자 조용히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야만 하는 민수는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나서봐야 소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게 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동안 시끄럽게 웅성대며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고 간 후에,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그들이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바람 한 점 없는 숲은 너무나도 고요해져 버렸습니다.
그들이 떠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민수는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속이고 민수가 숨어있는 큰 나무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망이질을 쳐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참이 지났지만 민수 주위에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민수를 향해오는 어떠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소소를 납치한 채로 정말로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떡하지?”
민수는 너무나도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지금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낯선 숲속에 홀로 남겨지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소소는 나쁜 악당들에게 붙잡혀 가서 목숨마저 위태롭습니다.
민수는 어떻게든 소소의 할머니 페페를 찾아서 소소와 페페 할머니의 위험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앞만 볼 수 있다면!”
민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손으로 더듬어 가며 되도록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민수의 모습은 아주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온 신경을 다리와 귀에 모았습니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요? 민수는 문득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민수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자 저 위쪽 높은 곳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인지 아니면 어둠의 바람 일당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 참을 망설이던 민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소소를 생각하면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기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저, 바람님 제 말이 들리시나요?”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혹시 제 말이 들리시거든 제발 대답해 주세요.”
또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저는 페페 할머니를 찾아야만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페페? 인간의 아이인 네가 어떻게 페페님을 알고있지?”
민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바람은 페페 할머니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어둠의 바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소의 친구예요. 그런데 소소가 위험에 빠졌어요. 페페 할머니도 마찬가지고요. 그 때문에 저는 꼭 페페 할머니를 만나야만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바람은 잠시 경계하는 듯 싶더니 민수가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 크게 놀라며 민수를 페페 할머니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민수는 다시 바람에게 안기어 낯선 숲 위를 날게 되었습니다. 얼마쯤 후 민수를 안고 가던 바람이 민수를 부드러운 풀 위에 살짝 내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렴. 인간의 아이야.”
바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민수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초여름의 날씨라지만 병원에서 나눠주는 환자복만을 입고있던 민수는 숲속의 밤 기운에 몸이 떨려왔습니다. 추위와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민수의 곁으로 아까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바람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혼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바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요.
“네가 나를 찾고 있다지 인간의 아이야?”
온화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 저는 민수라고 하고 소소의 친구예요. 페페 할머니 신가요?”
“그렇단다. 바로 내가 소소의 할머니 페페란다.”
민수는 빠르면서도 차분하게 오늘 소소와 함께 페페 할머니를 찾아오던 길에 어떤 골짜기에서 어둠의 바람들이 모여있던 것을 발견하게 된 경위와 거기에서 그들이 나누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소소가 잡혀가게 된 것과 그들이 페페 할머니의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민수의 얘기가 이어지자 다른 바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민수의 얘기를 중단시키는 바람은 없었습니다.
페페 할머니 역시 모든 얘기를 끝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화한 목소리로 민수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사실은 우리도 그들이 무언가 나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단다. 그래서 그것을 의논하기 위해 모두들 여기에 모여 있었고. 하지만 그들이 벌써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있었는지는 몰랐구나.”
페페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민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습니다.
“보아하니 너는 오늘밤에 너무나도 많은 고생을 한 것 같구나. 이제부터의 일은 모두 우리에게 맡기고 너는 좀 쉬도록 하려무나. 내가 다른 바람을 시켜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마.”
“소소는요?”
민수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소소는 지금 우리가 구하러 갈 거란다. 그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알고있지.”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소소가 안전한지 꼭 확인하고 싶어요.”
민수의 부탁에 페페 할머니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민수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어쩌면 네가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해서 민수는 바람들과 함께 페페 할머니의 뒤를 따라 소소가 잡혀있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아까 민수를 페페 할머니에게 데려다 주었던 바람이 다시 민수를 안고 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바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여서인지 바람소리가 몹시 세차게 들렸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서 날고 있는 민수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날리는 정도의 약한 바람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날아간 후에야 민수는 다시 땅에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세차게 들리던 바람소리들도 차츰차츰 줄어들고 마침내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정도의 바람소리말고는 주위 전체가 조용해 졌습니다.
“뚜베르!”
페페 할머니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뚜베르! 네 놈들이 거기에 숨어있다는 것을 다 알고 왔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라!”
앞을 볼 수 없는 민수는 페페 할머니가 소리치는 곳을 볼 수는 없었지만 페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까 와는 달리 몹시 위엄 있고 힘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하하하. 기다리고 있었다 페페 할멈.”
소소와 함께 숲에서 들었던 굵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민수는 그 때의 공포가 밀려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뚜베르. 이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네 놈들이 내 손자인 소소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서 소소를 돌려보내고 네 놈들은 조용히 네 놈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네 놈들을 용서해 주겠다.”
“하하하. 늙은 할멈이 너무 말이 많구먼. 할멈의 손자가 여기 시끄럽고 성가신 꼬마 녀석이 맞다면 여기 잘 있으니 똑똑히 보라고.”
“할머니!”
소소의 목소리였습니다. 소소는 아직까지는 무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소의 목소리에서도 민수가 느끼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소소도 자신 때문에 페페 할머니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을 알고있었으니까요.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그만......”
“괜찮다 얘야, 이제 내가 왔으니 안심하거라. 내가 곧 너를 구해줄 테니 말이야.”
“하하하. 페페 할멈 우리는 절대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앞으로 이 곳은 우리가 다스리게 될 것이니까. 네 놈들이 멋대로 지어낸 약속이니 규정 따위에 더 이상 얽매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니 살고싶다면 네 놈들이 여기를 떠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 뚜베르란 자의 목소리에는 자만심이 가득 넘쳐 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할멈의 손자를 무사히 데려가고 싶다면 할멈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을 순순히 내놓아라. 늙은 할멈이 가지고 있기엔 너무 벅찬 물건 아닌가? 힘으로 보나 나이로 보아도 나에게 어울리는 것들이지, 하하하.”
그 말을 들은 다른 바람들이 몹시 분개하여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베르라고 불리는 굵은 목소리의 악당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힘으로 싸워서 빼앗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 있는 할멈 손자를 봐서라도 순순히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에게 대적하거나 소멸의 불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여기 있는 이 꼬마 녀석의 목숨은 나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페페 할머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뚜베르라는 자의 손에 붙잡혀있는 소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페페 할머니는 위엄 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뚜베르 일당에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너희에게 같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저버린 건 바로 너희들이야. 그래서 네 놈들이 여기서 추방당한 것이 아니냐? 네 놈들이 이 곳을 지배하게 된다면 이곳은 분명히 얼마 가지 못해 폐허가 될 것이 뻔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너희가 이곳에 발붙이게 할 수는 없다.”
페페 할머니의 말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은 네 놈들과 같은 악당들에게 함부로 넘겨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바람들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만 이 불들을 사용해 왔다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소가 비록 내 가장 귀한 손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희에게 이 생명의 불과 소멸의 불을 쉽게 내어줄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끝까지 싸워 이 불들을 지켜내고 너희를 이 땅에서 몰아낼 테니 각오들 하여라.”
“하하하. 이 늙은 할멈이 이젠 미쳤구먼.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할멈 손자 녀석과 함께 보내주지.”
뚜베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수의 주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바람들 간에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민수가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찬 폭풍우와 같은 바람들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도 아주 요란해서 마치 여기저기에서 대포가 터지는 것 같아 민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민수는 그저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들리는 소리로 보아 아주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나무가 부러지거나 쓰러지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이러한 아수라장 같은 상황은 한참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무엇도 할 수 없는 민수가 나무뿌리를 꼭 껴안고 엎드려 있을 때였습니다. 페페 할머니가 민수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습니다.
“민수라고 했지?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니?”
민수는 대답대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고맙구나. 그렇다면 지금 엎드려있는 상태에서 곧장 앞으로 기어갈 수 있겠니?”
민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 100미터쯤 가고 나면 소소를 큰 소리로 부르도록 하여라. 소소가 네 목소리를 듣고 네 품속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소소를 붙잡고 있는 자들을 교란시켜 소소가 네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마. 할 수 있겠니?”
민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꼭 명심하거라. 소소가 네 품에 들어오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로 몸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소소의 목숨이 걸린 일이란다.”
페페 할머니는 민수에게 소소가 품에 들어온 후에는 절대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몸을 일으키지 말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한 후에 후 민수의 곁을 떠났습니다.
머리 위에서는 계속해서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불어댔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민수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갔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지만 민수는 모든 신경을 팔과 다리에 집중시키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요?
“지금이다!”
페페 할머니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수는 기어가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지탱한 채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소!”
“소소, 빨리 내게로 와!”
바람이 너무 거세서 민수는 그러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것이 몹시 힘이 들었습니다.
“소소, 여기야. 어서 서둘러!”
다행히도 얼마 있지 않아 소소가 그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민수에게로 왔습니다.
“민수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소소,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네 품으로 들어오도록 해. 페페 할머니가 일러 주신 거야. 어서 서둘러.”
“알았어.”
민수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소소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무서운 뚜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이 건방진 꼬마 녀석 같으니라구. 네 놈이 어딜 도망가려고. 네 놈이 내 손에서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놈을 혼내주고 말 테다.”
몹시 화가 난 뚜베르는 민수를 발견하고 더욱더 화가 난 듯 소리를 쳤습니다.
“아니, 이 인간 아이는 또 뭐야? 참 성가시군. 이 버릇없는 녀석들 어차피 이젠 쓸모도 없을 테니 이 인간아이와 함께 모두 한꺼번에 없애주도록 하마. 각오해라 이 꼬마 녀석들.”
천둥같이 울리는 뚜베르란 자의 목소리 때문에 민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민수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으므로 페페 할머니의 말대로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었습니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제발 페페 할머니가 어서 빨리 도와주러 오기만을 간절히 빌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무언가 눈앞에 밝은 빛이 번쩍하고 빛났습니다. 붕대를 감은 민수의 눈으로도 느껴질 만큼 강한 빛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 걸까?’
민수는 엎드려 웅크린 채로 생각했습니다. 죽는다는 두려움에 더욱더 몸은 움츠러들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인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있을 때였습니다. 민수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들이 연이어 들려왔습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들 때문에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페페 할머니가 그들을 향해 소멸의 불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세찬 돌풍이 민수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민수는 바람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바닥에 있는 풀과 나무뿌리 같은 것을 있는 힘을 다해 꼭 붙잡고서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그칠 줄 모르더니 점점 멀어지는 듯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풍과 함께 대포 소리 같던 바람 소리들도 차츰차츰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민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소, 아가야, 무사한 게냐?”
페페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수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습니다. 품속에 있던 소소가 재빠르게 빠져 나왔습니다.
“할머니!”
소소의 목소리를 듣자 민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페 할머니와 소소가 반갑게 재회하는 소리를 들으니 한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죽는구나 생각했던 자신이 소소와 함께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주위의 상황으로 짐작해 보아 이제 악당들은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페페 할머니가 승리를 한 것입니다. 페페 할머니를 비롯해 주위의 모든 바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소를 무사히 구출해 내고 악당들을 물리쳤으니 말입니다.
“민수라고 했나? 인간의 아이야, 정말로 고맙구나. 네 덕분에 우리 소소가 이렇게 무사하게 됐으니.”
“무슨 말씀이세요, 페페 할머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걸요.”
“아니다. 네가 우리 소소의 목숨을 구해 준거나 다름없단다. 사실 소소가 그들의 손에 잡혀 있는 한 우리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란다. 게다가 나는 그들에게 함부로 소멸의 불을 사용할 수가 없었단다. 소소까지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소멸의 바람은 뚜베르 일당 같은 어둠의 바람들을 물리쳐 우리 바람들의 평화를 지키도록 태초에 신께서 내려주신 것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지. 민수 네가 몸으로 소소를 완벽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에 내가 안심하고 소멸의 불의 힘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거란다.”
민수는 그제서야 페페 할머니가 자기에게 왜 그렇게 행동하도록 시켰는지 모두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소를 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없이 기뻤습니다.
“자, 이제 곧 해가 떠오를 테니. 민수는 네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페페 할머니는 계속해서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네게 고맙다는 성의 표시를 하고 싶구나. 우리 바람들을 위해서 애를 써준 보답이란다”
페페 할머니는 품안에서 금색의 작은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어 붕대를 감고 있는 민수의 눈에 대었습니다.
민수의 눈앞에 또 불빛이 번쩍했습니다. 아까 와는 달리 따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따뜻했던 느낌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악!”
민수는 갑자기 눈이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통증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곧 개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놀랐다면 미안하구나. 이 생명의 불이 네 눈 속에 있는 모든 나쁜 것들을 녹여내느라 그런 것이란다. 네 눈 속에 무언가 아주 고약한 것이 들어 있었나 보구나. 하지만 네가 잘 참아낸 덕분에 곧 앞을 볼 수 있게 될게다.”
민수는 페페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페페 할머니의 말씀대로 이제 곧 날이 밝아올 테니까요. 민수는 페페 할머니와 다른 바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바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소가 민수를 다시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병원으로 오는 내내 민수와 소소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민수와 소소는 병원 뒷마당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민수야, 오늘 내 목숨을 구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아니야, 네 덕분에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잖아. 오히려 내가 고마운걸. 내가 앞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너를 계속 만날 수 있는 거지?”
“물론이야. 네가 나를 잊지 않고 나에게 귀를 기울여만 준다면.”
소소와 함께 목숨을 건 모험을 해서일까요? 민수는 소소와 헤어지는 게 너무나도 섭섭했지만 민수의 엄마가 잠들어 계신 병실로 다시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민수의 엄마가 간밤의 일을 눈치 채시면 절대로 안되니까요. 민수의 엄마는 아직도 침대 곁에서 곤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소소는 민수를 데리고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민수를 침대에 부드럽게 내려주었습니다.
소소가 떠나고 나자 민수는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되새겨보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피곤하고 지친 탓에 곧바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민수야, 민수야!”
엄마가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민수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붕대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엄마가 민수의 팔을 가만히 흔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민수를 깨우려고 하셨습니다.
“엄마! 저 일어났어요.”
“민수야,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잠을 많이 자니? 지금이 몇 신줄 아니? 벌써 오후 2시야. 그리고 옷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손하고 발하며…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구나.”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담겨있었습니다.
“밤 새 날씨가 고약하게 변덕을 많이 부렸다는 구나 글쎄. 돌풍에 태풍에......”
“엄마, 눈에 있는 붕대를 좀 풀어주세요.”
“무슨 말이니?”
“붕대 말이에요, 엄마. 붕대를 좀 풀어주세요. 갑갑해요.”
처음엔 안 된다며 말리던 민수의 엄마는 붕대가 갑갑하다며 민수가 계속 조르자 할 수 없이 민수 눈에 감긴 붕대를 풀어 주었습니다. 민수는 눈을 감고있던 붕대가 다 사라지자 가만히 눈을 떠보았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눈을 떠서인지 눈이 조금 시려왔지만 참을 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뿌옇고 흐린 것이 눈을 덮고 있는 것 같이 잘 안보이더니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리던 것도 금방 가시게 되었구요. 민수는 자신이 눈앞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민수가 시력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엄마! 이제 엄마가 다시 보여요!”
민수도 믿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눈앞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도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민수의 엄마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의사들은 믿을 수 없는 기적이라며 한 바탕 소란을 피워댔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거친 후에 의사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민수의 눈이 완전히 회복이 되었으며 이제 곧 퇴원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민수는 이 모든 것이 페페 할머니의 생명의 불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소소를 만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날 오후 민수는 아직도 기쁨에 여전히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엄마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한 후에 병원 뒷마당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다시 소소를 만나게 될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