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2012년 1월의 긴긴 밤입니다.
나는 밤 무렵까지 일터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나름대로의 여가를 즐기다가 이 시간에, 이 글을 적습니다. 가슴 한켠으로 아련하게 저미어오는 쓸쓸하고도 신선한 단상을 하나 발견한 까닭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인데다 용돈벌이로는 나쁘지 않은. 오늘은 고된 시집살이라도 하는 듯 퍽, 고되었지마는.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고 머릿속에 잘 적어두었다가 지금에는 선명하게 풀어 헤치는 것이 또 다른 보람이라 여깁니다.
내가 일을 하는 곳은 생과일전문점 프랜차이즈 매장인데, 손님이 많지 않은 저녁에는 카운터에 앉아 일을 봅니다. 하는 일은 딱히 없습니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이지요. 그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즐겁지만 나를 주의시키는 사장님이 있으니 나는 그저 손님을 기다리는 순종적이고 충성된 직원처럼 행세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원하고 기도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 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하는 전부입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나가는 사람들 한명 한명을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히나 손님이 많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삭막하고 텅 비어 있었으며 쓸쓸하여서 쇳소리 가득한 바람이 새어드는 듯 했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어디론가를 향해 바삐 움직입니다. 잠시 망설이는 것도 주저할 만큼 보이고 스치는 것들과, 시간과, 그들이 밀고 있지만 사실은 끌려가고 있는 듯한 카트에 의해 말이지요. 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왠지 측은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에스컬레이터에서 막 내려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중년 남자, 그는 내가 여고를 다니던 때, 컴퓨터 과목을 담당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마냥 반가워만 할 수는 없었던 까닭은 2년 전, 그가 자녀의 상을 치룬 것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쌍둥이인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화재 사고로 인해 그만 죽어버렸고 막내 딸 혼자 살아남은 상황이었습니다. 학교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고 뉴스에도 보도되었는데, 그 후 못내 가슴 아프고 서러울 사람, 그 선생님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하게, 아니 지극히 자연스럽게 한 대형 마트에서 고객인 선생님을 아르바이트 직원인 내가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빨간 스웨터를 입고 평상시처럼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선생님. 갑자기 서서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아내를 찾는 것 같습니다만, 이내 매장 입구로 들어가버리는군요. 그 모습을 나는 단 한 줌도 닿지 않을 안타까움으로 응시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이와는 안타까움으로 마주하고 또 어떤 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스쳐갑니다. 인생에서 필연적인 순간, 인연이란 이렇게 안타깝고 허무하며 공허한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만나고, 아니 만날 것까진 아니더라도 눈을 마주치며 혹은 옷깃을 스치며 지나친 사람들, 내가 단 한순간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려보면 미처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곱게 헤어져 남은 인연을 추억하기란 어려운데, 나는 인생에서 단 한순간도 만나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으며 그 존재를 알고 느끼지도 못한 채 언젠가는 생을 마친다는 사실이 오묘한 숙명처럼 여겨졌습니다.
내 눈에 비치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 시간, 그 장소에 존재하는 단 한순간만을, 단단치 않은 껍질로, 묵직한 덩어리로만 남아있다 이내 사라집니다. 그들이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 만나 가정을 이루었는지 혹은 단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그들을 볼 기회가 내게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건 내게 주어진 길과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스치고 마주치는 존재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내가 별다른 연유 없이 바라보는 이들은 나의 운명에서 벗어난 걸까요. 따라서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볼 수 있는 미래가 허락되지 않는 이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운명 바깥의 존재들이겠지요.
그들을 바라보며 무상감에 젖을 때 또 다른 가슴 한 켠으로 밀려드는 바람은 따스함을 잔잔하게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인연이란 쉬운 법이 없이 내 운명을 바람개비처럼 돌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이들이 얼마나 단단치 않은 확신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인연이 얼마나 무거운 존재들을 헤치고 내 앞에 섰는지, 그러다 문득 더는 부인할 수 없는 감사와 소중함이 밀려오자 나는 그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기억이 흐릿한 과거에도 별밤을 지나는 지금도 쉽지 않을 확신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나는 여전히 무수한 인연을 스치고 마주할 겁니다. 앞으로도 종종 인생 길을 지나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지금처럼 덧없는 인연에 허전하였다가 쓸쓸하였다가 슬퍼졌다가 지나간 인연, 지금 와서야 아련하고 추억에 젖은 인연을 그리워하고 그 인연이 남겨놓은 미련과 같은 발자국을 돌아보며 슬퍼도 하겠지요.
그러나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허전함과 쓸쓸함과 슬픔 끝에 가지런히 얹어두어야 할 감사하는 마음, 그 인연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난 내가 지금과 앞으로 스치고 마주칠 사람들에게 후회 없는 소중한 인연을 선물하기 위해 그들을 단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며 사랑하고 아끼고 상처를 남기지 않는 진심을 부어주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