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출생. 빈의 미술공예학교를 나온 뒤 역사주의 감화를 받아 괴기·장식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유명한 부르크 장식의 벽면장식에서는 모든 유파를 절충한 양식이 보이나 1898년경부터는 독자적인 장식 패턴을 구사하여 상징의 주제를 찾아냈다.
1900∼1903년에는 빈대학교 벽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표현이 너무나 생생하여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고독에 묻혀 자기 스타일에 파고들었다.동양적인 패턴 장식양식에 착안한 점, 추상화와도 관련을 가지면서 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로운 기법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명화로써의 감동을
자아내는 일들을 하고있다.
클림트의 그림을 실제로는 본적이 없으면서도
이 사회의 편리함으로 인해 그의 작품들과 그의 관련 서적을 읽었던기억이있다.
특히 생명나무. 유디트 같은 그림들은 그 독특한 관능의 의미를 엮었던게 사실이다.
그도 한시대를 살면서 고독과 싸워서 얻은 '거미' 일것이다.
김중시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거미는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사회에 기생해 살면서 간편히 편승해버리는 프로그래시브 아나키즘이라던가.
말짱한 얼굴들로 마주하는 사회적인 환멸은 어쩌면 88만원 세대라고
비판당했던 불신의 사회의 모습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
고졸력의 학력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에는 건강하고 능력있는 인재들이 많이있다.
개인은 개인의 능력을 사기쳐야하는 시대이거나 가방줄을 재는
사회의 구조 틀안에서 기업의 형태들은 하나같이 그 문짝이 높기만하다.
사실 거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잘된 경우도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가.
장정일씨. 황석영씨. 소년원이나 감옥을 다녀오고나서 작가가 된케이스이다.
사회에 주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건 어떤의미에선 고독 그자체일지도.
거미는 영영 돼지를 만나지는 못한다.
상징적인 문구지만. 그야말로 인간 하나의 가치는 그 존엄을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인 사회인거같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에 남는 이들은 맘몬의 지배자들.
한 사람의 뇌와 정신구조와 존재성을 무시하면 그 사회는 그만큼의 지옥을 겪게 되어있다.
사회 상류들은 세상이 저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세상은 서로를 향해 부는 저울이니까.
독단은 없지만 외치는 소리를 위해 노력한이들에게 주어지는 평안이란.
그 넓은 바다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시인들은 왠지 사이비 교주같은
주체성을 띄는 사실이 매우 분해하는 일인으로써의 발언이다.
같은 말과 사회분석으로 먹고사는 처지에
한쪽은 정치인이고 한쪽은 시인의 구도를 걷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국가인가? 현실국가인가?
사회의 한 부분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한 쪽은 권력자이고 한 쪽은 권력해체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모르고 삶을 즐기는 민중이 있다.
삼파의 구도속에 등이 터지는건 어디인지는 그 누가 말안해도 알리라.
그것이 지금의 현실유가 아닌가한다.
사람들은 클림트 유화를 보러다니고 있다.
유흥과 도피와 낭만의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