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었던 맑은 하늘에 칙칙한 먹구름이 낄 때부터 조금 이상하더라니 곧 굵은 장대비가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산천초목을 적셨다. 또한 마른 대지를 적셨고, 움푹움푹 패인 구덩이에 고이거나 썩은 웅덩이 위에도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적셨다.
나는 한참을 꼼짝 않고 있었다. 비에 흠뻑 취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른 고목이었다. 메마른 땅이었다. 낙엽이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뽑혀지는 잡초였다.
넘쳐 오르는 고독과 절망의 노예이자, 끓어오르는 증오의 주인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갈가리 찢겨져나간 감정이라는 여린 놈이 만들어낸 상처라는 이름의 갈증이었다.
항상 나는 갈증에 시달린다. 때문에 이렇게 비가 올 때면 서두르지 않는다. 이슬비이건 장대비이건 느릿한 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며 차가운 수분을 내 몸으로 받을 뿐이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비를 맞아도 내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날이면 잠잠했던 녀석도 심장을 뚫고 나올 기세로 발버둥을 치곤 한다.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아 부루퉁한 입술이 파리해졌다. 온 몸에는 한기가 감돈다. 이렇듯 추위에 미칠 듯 떠는데도 아직도 감정이란 녀석은 끔찍하리만치 뜨겁다. 용광로처럼, 그래 용광로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파괴한다.
이젠 지쳤다. 이 나약한 녀석에게 넌더리가 난다. 더 이상 질펀한 고독과 마주하는 것도 싫고, 매일 발작을 일으키는 나를 진정시키기도 싫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놓으려는 것이다.
감은 눈을 슬며시 떴다. 거센 빗줄기가 이제는 제법 잔잔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찔한 높이. 그 높이에서 아래를 바라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아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틀림없이 죽을 수 있다는 안도감. 실패해서 식물인간이 되거나 반병신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드디어 편해 질 수 있다는 그런 느낌들이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사람은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삶을 갈망하는 자들에 국한된 이야기일 것이다.
어차피 끊어져 없어질 목숨인데 그걸 기억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거리다. 난 기억할 추억도 없고, 또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다음 생애의 삶을 꿈꾼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 벼랑 끝에서 떠올린 마지막 상념이었다.
나는 비가 되련다. 그래서 나 또한 산천초목을 적시련다. 서로 애간장을 녹이는 연인들의 마음속에도 내려 촉촉이 적시련다. 이리저리 밟히는 잡초에게도 내려 그를 적시고, 동물들과 인간들에게는 피와 살이 되련다. 그리고 내 진심을 끝내 말하지 못한 그녀의 마음속에도 내리련다.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지천으로 내리련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드디어 발을 떼었다. 발은 허공을 밟는다. 나의 육신은 창공을 날았다. 누가 나를 추락한다고 말하겠는가? 왜냐하면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기에, 추락이 아닌 비상이며 출구가 아닌 입구이기에 나는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환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나는 이 속세에 존재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어떠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